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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여! 당신의 방드르디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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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여! 당신의 방드르디는 어디에?"

[철학자의 서재]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펴냄). ⓒ프레시안
단절과 소통의 교차점, '섬'

진부한 이야기지만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타인들과의 어떤 '거리감'을 느끼곤 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서 소통, 공감, 이해 등이 부족해 생기는 이 거리감은 때론 커다란 무게감으로 다가와 가뜩이나 퍽퍽한 삶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든다.

정현종 시인은 이것을 "섬"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표현했다. 타인과의 어쩔 수 없는 거리감에서, 이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한편으론 나와 타인 사이의 이 건너 갈 수 없는 섬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건널 수 있는 섬을 요청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그 섬에 가고 싶다"란 막연한 소망을 수줍게 말하면서 이 짧은 시를 마무리 한다. 나, 타인 그리고 섬은 우리들의 사회적인 삶을 표현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들이다.

21세기 로빈슨 크루소와 양가(兩價)감정

약간 다른 방향에서 섬을 이야기 해보자. 휴가를 맞이하면 우리들은 지친 삶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이 없는 섬을 찾아 떠난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들은 21세기의 로빈슨 크루소들이다. 이들은 섬 속에서 나름의 홀가분함을 느끼고 다시금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참 우스운 것은 섬을 찾아갔을 때의 홀가분함 속에는 아쉬움이 끼어들고, 다시금 사람들이 미어터진 공간에 들어올 때면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혼자이고 싶지만 결국엔 혼자일 수 없는 세상살이의 감정은 꽤나 철학적인 질문으로 다가온다. 욕망과 이성, 질서와 무질서, 문명과 야만, 책임과 무책임의 대립항들은 우리가 섬을 바라보는 모순적인 시선과 일치한다. 섬은 따라서 타인이 없어야만 하는 유토피아이자 타인이 있어야만 하는 디스토피아이다. '타인 없는 세상'을 갈망하면서도, '타인과 함께 있는 세상'을 요구하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바로 21세기 로빈슨 크루소들의 근본적인 성격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랑스 문학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21세기의 로빈슨 크루소인 우리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질문은 로빈슨 크루소에게 타인 혹은 타자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투르니에의 책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김화영 옮김, 민음사 펴냄, 이하 <방드르디>)은 1719년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를 근본 모티브로 삼아, 로빈슨 크루소로 대표되는 섬에 홀로 남겨진 인간 그리고 세상 속에서의 타인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 창조한다. 앞서 언급한 시처럼, 이 책에서 투르니에는 아무도 없는 섬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타인 없는 세상과 타인과 함께 있는 세상의 공존과 화해를 묘사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알아야만 한다.

디포는 1719년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발표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는 28여 년을 무인도에 혼자 살면서, 이 무인도를 해가 지지 않는 자신의 고국인 대영제국의 위대한 영토로 바꿔놓는다. 28여 년 동안 로빈슨 크루소는 이 섬에서 총독, 제독, 재판관으로 살아간다.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며, 나름의 질서와 법칙을 제정하고 왕으로 군림한다. 여기서 섬은 야만의 상징이고 로빈슨 크루소는 문명의 상징이다.

야만의 상징으로서 섬과 문명의 상징으로서 로빈슨 크루소라는 기묘한 대비는 나아가 극 중에서 '프라이데이'라고 하는 혼혈 인디언이 등장했을 때에도 반복된다. 우연찮게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살게 된 프라이데이는 여전히 야만의 상징이며, 따라서 로빈슨 크루소는 단지 자신의 노예이자 자신의 분신으로 프라이데이를 바라본다. 즉 디포의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 이외의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무인도는 야만의 상징이자 타인 없는 세상으로서 단순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또한 타인과 함께 하고픈 욕구가 유아론적 욕망 충족과 단절감의 야만적인 극복으로 변하게 되는 디스토피아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유는 어찌됐건 로빈슨 크루소의 '타인'이 없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섬에서는 나와 타인 없는 세상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타인을 통해서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타인을 통해 나를 반성하기도 한다. 그 결과, 2500여 년 동안 이어진 인간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언명은 바로 '인간은 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이 구성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인은 타인 혹은 타자라고 하는 나 자신 외부의 '어떤 것'이다.

타인 없는 세상의 의미

이제 미셸 투르니에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나의 정체성과 인간성을 위해선 타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란 식의 근대적인 교훈을 말하진 않는다. 다만 투르니에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전복시켜 타인의 의미와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시도는 우선 로빈슨 크루소에서의 프라이데이(투르니에의 소설에서는 '방드르디')의 위치를 격상시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타인 없는 세상에서 나의 타인·타자를 등장시켜 이들과 함께 있는 세상의 긍정성을 복원시키는 것인데, 다시 말해 타인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여 나의 대립항으로서 타인의 성격을 거부하고, 이 타인의 성격을 긍정적인 가치들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책 본문을 살펴보면, <방드르디>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로빈슨이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고,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부정하는 부분이다. 이는 섬을 부정하는 로빈슨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타인과의 단절은 인간의 근본적인 필수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로빈슨은 이 단절감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이 남겨진 무인도를 부정한다.

그런데 타인 없는 세상에 남겨진 고독과 단절감은 내가 인간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무너뜨리면서, 새삼스레 타인을 요청하는 감정으로 이행한다. 투르니에는 타인 없는 세상에서의 로빈슨 크루소 모습을 통해, 타인과 함께 있는 세상에 대한 로빈슨 크루소의 요구를 묘사한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는 엎드린 채 변을 보고, 자신의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배설물 속에서 뒹굴었다. (48쪽)

이제 확실한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타인 없는 세상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도 없는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타인 없는 세상은, 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치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복잡다단한 감정의 소비 없이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을 누리면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 자신의 고유한 삶은 타인이라는 지평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타인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에서 타인과 함께 있는 세상으로의 이행을 요구하게 한다.

따라서 이제 로빈슨은 타인과 함께 있는 세상을 요구한다. 투르니에는 로빈슨이 수행하는 타인과 함께 있는 세상에 대한 요구를, 섬을 타자화시켜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모습-즉, 섬을 개간하고 가축을 기르며 제도와 질서를 도입하는-으로 표현한다. 나에게 필요한 타인은 굳이 다른 인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 다른 나'와 '나 이외의 어떤 다른 것', 다시 말해 타자화란 방식을 통해서도 그 의미가 보존된다. 여기에는 "타인의 존재가 인간 개인에게는 근본적인 요소이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142쪽) 투르니에의 근본적인 생각이 깔려있다.

이것으로부터 디포와 투르니에의 구분점이 발생한다. 우선 전자에서 섬을 자신의 영토로 만드는 과정은 바로 내 욕망의 실현이었으며, 섬을 나와 동일시하려는 충동이었다. 즉 여기에는 타인과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후자에서 로빈슨은 타인의 존재를 섬이라고 하는 타자로 대체하고, 나의 정체성과 인간성을 위한 근본적인 토대를 마련한다.

타인 없는 세상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세상으로의 이행

그렇지만 섬 자체를 타자화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방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나 자신만큼이나 자립성을 갖는 타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나의 타자와 일방적인 관계를 맺게 되며, 동시에 타자도 역시 나에게 일방적인 관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인간성을 확립시켜주던 섬의 타자화는 어떤 질서와 억압이라는 강제성으로 다시금 로빈슨 크루소에게 되돌아온다.

따라서 로빈슨 크루소는 이 문명화된 자신의 영토를 파괴하고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투르니에는 여기서 새롭게 섬을 '인간화'하는 방식을 도입한다. 섬은 이제 단순한 자신의 타자가 아니다. 섬은 자신과 함께 호흡하는 하나의 자립성을 갖는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방드르디>의 마지막 부분은 방드르디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한다. 섬을 인간화하여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에게 '진정한 타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디포의 프라이데이는 앞서 얘기했듯이, 로빈슨 크루소의 분신으로서 그의 타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투르니에는 방드르디를 새롭게 구성한다. 즉, 방드르디에게 잃어버린 타인이라는 지위를 다시금 부여하고, 타인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하는 것이다.

애초 디포의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관계는 문명과 야만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반면 투르니에의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자신의 타인·타자로 인정한다. 이로부터 이 둘의 관계는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넘어서게 되며 방드르디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갖는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로빈슨 크루소에게 방드르디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타자의 역할임과 동시에, 또한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게 하는 기쁨, 희망, 사랑, 생명력, 충만함 등의 긍정적 가치들을 상징한다. 이제 로빈슨은 자신의 거울로서 방드르디를 바라보게 되고, 이것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그럼 우리들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오자. 21세기의 로빈슨 크루소들에게 타인은 아직까지도 강제와 억압의 상징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에 대한 반발로서 섬을 찾는다. 그러나 강제와 억압일지언정 우리에게 타인은 결코 불필요한 존재로 남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들은 타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양가적인 감정의 한 가운데서 투르니에는 타인과 타자의 성격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는 '타인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니, 이 양가감정을 극복하라'는 식의 충고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대신 투르니에는 21세기의 로빈슨 크루소인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있다. 이 타자라는 것이 우리들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들이고, 우리들은 이 타자를 나의 방식대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구성된 나의 타인과 타자는 어떤 긍정적인 가치들로 대체되어 나의 삶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글을 마칠 무렵 다시금 떠오르는 질문은, 투르니에가 21세기 로빈슨 크루소인 우리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과연 무엇일까란 것이다. 그는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쉽게, 그리고 좀 더 너그럽게 타인을 바라볼 때, 타인 없는 삶을 갈망하면서도 그 타인을 요구하는 우리들 감정의 '어쩔 수 없는' 모순된 무게감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양가감정이라고 하는 우리들의 모순된 감정이 우리네 인생살이에 커다란 짐이 되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건 아닐까.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보다 투르니에의 로빈슨 크루소가 갖는 장점은, 타인과 타자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타인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졌다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타인을 배척하지 않고 '더불어 가는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타인이라고 하는 무거운 존재감이 날로 더 커지는 상황에서 그걸 감수하느냐 도피하느냐는 각자의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타인에 대한 부정에서 오는 그것의 참기 힘듦보다는 타인을 인정하면서 생기는 우리들 자신의 참을성이 양가적인 감정에 빠지는 우리들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일러두기 : 본문에서 나오는 "타인 없는 세상"의 표현은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방드르디>에 관해 쓴 논문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질 들뢰즈, 이정우 옮김, <의미의 논리>, 474~499쪽)에서 그 단어만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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