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볕을 즐기는 도마뱀. 중국의 고전 <박물지>를 보면 이 도마뱀을 원료로 처녀성을 증명하는 '수궁사'를 제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무협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황당무계한 수궁사에도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사유가 숨어 있다. ⓒ뉴시스 |
"수궁사의 재료는 도마뱀이다. 도마뱀을 그릇 속에서 기르면서 주사(수은)를 먹이면 도마뱀의 몸이 온통 붉은 색이 된다. 계속 먹여서 일곱 근이 되었을 때 아주 여러 번 절구질을 해서 여자의 지체(보통 팔뚝)에 바르면 죽을 때까지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 오직 성관계를 가질 때만 없어지니 자궁을 지키는 수궁(守宮)이라고 한다. 한무제가 시험하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개명 천지에 웬 '처녀성' 타령이냐고? 맞다. 수궁사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호령하던 시대의 허망한 잔재다. 그러나 <박물지>가 전하는 수궁사를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오랫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사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도대체 옛사람이 어떤 논리로 이런 수궁사를 고안해냈는지 살펴보자.
도마뱀은 본래 색깔을 잘 바꾸는 동물이다. 주역의 '역(易)'자는 바로 도마뱀을 형상화한 글자다. 동아시아의 사유, 즉 동양 철학의 기본 전제는 변화다. 도마뱀이야말로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와 가장 부합하는 동물이다. 도마뱀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수궁사에 부합하는 것은 '석척'과 '언전'이다.
<중약대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석척은 산의 돌 틈에 살고 뱀과 비슷하며 네 개의 다리가 있다. 길이는 20~30센티미터(㎝) 정도이며 잔비늘이 있다. 수컷이 약용으로 쓰인다. 언전은 울타리의 벽을 즐겨 오르는 종류다. 형태는 작고 색깔은 검다. 언전에 물리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을 물었다는 기록은 없다."
모든 약물에는 이(理)와 정(情)이 있다. '이'는 변치 않는 정체성을, '정'은 변화하는 관용성을 뜻한다. 옛사람은 도마뱀이 상황에 따라서 색깔을 바꾸는 외양과 다르게 내부에는 변치 않는 심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일본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적은 이범선의 '도마뱀의 사랑'이라는 수필은 그런 생각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의 집 벽은 나무로 얼기설기 골격을 짜고 양쪽에서 흙을 바르기 때문에 속이 비어 있다. 어느 집을 수리하려고 벽을 뜯다 보니 그 속에 도마뱀이 갇혀 있었다. 꼬리에 긴 못이 박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던 것. 그 못은 10여 년 전에 그 집을 지을 때 박았던 못이었다.
10년 동안 어떻게 살았나 싶어서 살펴보니, 한참 있다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기어왔다. 벽 속에 꼬리가 박힌 도마뱀을 구하고자 신의를 버리지 않고 동료(?) 도마뱀이 10년 넘게 먹이를 물어 날랐던 것. 도마뱀의 변치 않는 심성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도마뱀이 이런 내부, 외부의 다른 속성은 물과 닮았다. 물은 외부에 따라 모양을 쉽게 바꾼다. 그러나 둥근 그릇에는 둥글게, 네모 그릇에는 네모로 다양하게 형태를 바꾸면서도 '물은 물일 뿐'이라는 정체성은 똑같다. 한의학에서 이런 물은 '음'을 상징한다. 여성을 '음'으로 보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도마뱀=물=여성=음, 이런 사유의 연쇄가 만들어진다.
수궁사를 만들고자 도마뱀에게 먹였다는 주사(수은)도 마찬가지다. 수은은 '음', 즉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 물질이다. 즉 여성을 상징하는 도마뱀에 또 다른 여성을 상징하는 수은을 먹여서 만든 게 바로 수궁사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이런 수궁사를 여성의 팔뚝에 바르면 음의 기운이 고조된 상태가 된다.
옛사람은 당연히 이런 음의 기운이 고조된 상태에서 성관계처럼 양의 기운이 넘치는 외부 자극이 들어오면 색깔이 바뀌는 것과 같은 흔적이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수궁사도 사실은 치밀한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전통 사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런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사유는 수궁사의 예처럼 지금은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살필 수 있는 사료 이상의 효용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천연 약물을 찾는 노력에 이런 음양오행의 사고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은 한의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특정 질환에 효과가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천연 약물을 실험실에도 모두 그 효과를 살펴볼 수는 없다. 천연 물질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도 '맨 땅에 헤딩하기' 식은 곤란하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질병과 약물의 상관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예를 들면 음양오행의 관점이 힘을 발휘한다.
한의학은 오랫동안 한약의 식생을 비롯한 특징을 관찰해서 음양오행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약물로 활용했다. 예를 들면 사막 식물은 습기를 잘 간직해야 살고, 습지의 식물은 습기를 잘 배설해야 산다. 한의학은 음양 원리에 따라서 사막에 사는 알로에, 선인장은 피부 건조증, 변비, 체액 감소 등에, 습지에 사는 부들, 택사는 부종, 소변 이상 등에 사용했다.
이처럼 음양오행의 사유에 기반을 둔 한의학의 천연 약물의 옥석을 가리는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옛사람의 시대착오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이렇게 축적된 성과를 현대 과학의 성과와 조화를 이루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 아닐까? 세계적인 제약회사가 괜히 동양의 옛 문헌을 뒤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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