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부터 시작된 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 조직 축소 방침이 법제처(3월 23일)와 차관회의(3월 26일), 그리고 국무회의(3월 30일)를 거쳐 1주일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이미 주요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인권위는 정부의 조직 축소 방침(직제 개정령)에 맞서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고, 권한쟁의 심판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직제 개정령의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는 '대통령령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인권위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권위 조직 축소 논의가 시작될 무렵부터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법조계에서조차 정부의 인권위 축소 방침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들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인권위 조직 축소 방침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무는 늘었는데 조직은 축소…'괘씸죄'?
기실 인권위 조직 축소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 뿐 아니라 '공기업 선진화 방안' 등의 정책기조나 운영방침에도 부합한다. 정부 정책방향에 있어서는 인권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인 듯하다.
행정안전부는 인권위의 인력과 기구 등의 감축을 요구하면서, 그 판단의 근거로 국회 법사위에 제출된 조직정비에 관한 감사원 업무보고와 인권위 업무 효율성을 위한 조직진단 결과에 따른 인력감축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세간에는 2008년 촛불집회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결정을 내리고, 사이버모독죄 등 현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는 인권위를 가만 둘 수 없다는 '괘씸죄'도 한 몫 했다는 평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권위의 조직 축소가 가져올 영향은 매우 크다. 인권위 측의 자료를 보면 지난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간 인권위의 인력은 180명에서 208명으로 1.16배 증가한 반면, 업무량은 진정 2.3배, 상담 5.5배, 민원 10.4배 등 2~10배가량 증가했다. 게다가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연령차별금지법' 등의 시행에 따라 갈수록 업무량이 증가하여 오히려 담당인력을 늘려야 할 상황이라고 한다.
인권위가 자체적으로 외부전문기관에 의뢰해 실시한 조직진단 결과에서도 오히려 약 23명의 인력 증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인권위 조직을 축소한다면, 과연 노동인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차별행위 접수의 절반이 '노동인권' 문제
인권은 자유권, 사회권 등 다양한 권리로 구성되며, 흔히 "그 사회의 구성원이 건강할 권리", "사회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 등과 같이 포괄적인 내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노동인권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인권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국가는 그 사회의 취약계층을 고려해 고용의 촉진, 고용에 있어서의 차별금지, 노동시장에서의 평등한 결과를 위한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근로기준법 확대, △최저임금 적용 대상 확대 및 최저임금 수준 현실화, △퇴직금 및 기업연금 보장 및 확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보호와 노동권 보장, △안전한 작업장에서 일할 권리 보장 및 재해 보상, △근로감독행정 강화, △구제기구 및 절차 제도화 등이 그런 정책들이다.
인권위는 지난 몇 년 동안 사회권으로서의 노동인권을 신장시키는 역할뿐 아니라, 노동인권 정책 기능의 역할 또한 비중 있게 담당해 왔다. 우선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난 7년간 인권위에 접수된 차별 현황 추이를 보면 노동인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고용에서의 차별'이 2,312건으로 전체 차별행위의 절반가량인 43%를 차지하고 있다. 고용에서의 차별행위의 추이를 살펴보면 2002년 74건에서 2008년 467건으로 6.3배 정도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인권위에 접수된 고용 차별 중 '채용'(9.1%, 492건 중 470건 처리)이나 '모집'(9.3%, 498건 중 459건 처리)과 같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 18.4%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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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권 정책의 음지 살폈던 인권위가 사라지면?
한편 인권위는 사회적 약자 및 소수인권 보호 강화를 위해 '정책 및 법령에 대한 권고'나 '침해 및 차별 진정에 대한 권고 사항'을 국가에 제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2005년 4월 인권위는 정부의 비정규직법이 노동인권의 보호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비정규직 보호라는 당초 취지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또한 2007년 9월에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사회보험 및 노조법상의 권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최근에는 사내하도급근로 보호입법 제정 강구(2007.9.10), 이주노동자 단결권(2008.5.26), 최저임금법 개정(2008.12.18)에 대해서도 나름의 의견을 관련 기관에 제시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인권위의 권고와 의견표명은 주로 지난 7년 동안 특수고용직, 간접고용,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권 상황 실태 조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표2]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위 실태조사 대다수는 '취약계층'이나 '주변부' 노동인권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구과제들은 그간 학계와 노동계에서 다루어야 할 주요 과제였음에도 예산과 전문인력 부족 등의 문제로 연구되지 못했던 분야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인권위는 비정규직 남용 및 차별개선, 법제 모니터링 및 개선 등의 법제도 개선뿐만 아니라, 여성 비정규직 모성권 및 건강권 보호 등을 위한 인권증진 계획을 주요 사업으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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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과연 인권이 넘쳐나는 사회인가?
예전과 달리 '인권'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인권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인권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인권은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로서, '모든 사람이 성취해야 할 공통의 최소기준'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인권 선언문에도 "모든 사람은 근로의 권리,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을 누릴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제23조 1항)고 규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최소 기준으로서의 인권이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실현되고 있다면, 나는 인권위 조직 축소에 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현 정부에 묻고 싶다. 우리의 일터는 최소한의 기준을 갖추고 있는가? 인권위 조직을 축소해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는 노동인권이 실현되고 있는가?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의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법들은 노동현장에서 사용자들의 불법(不法), 탈법(脫法), 편법(便法)으로 인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일부 영세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아예 법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도 존재한다. 이 밖에도 우리 사회의 노동인권 문제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가 풀어주어야 할 밀린 숙제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정부가 인권위 조직 축소를 끝내 강행한다면 노동인권과 관련한 '숙제'들은 나중에는 풀기 힘들 정도로 더욱 더 쌓여가게 될 것이다.
특히 약 44명을 감축하도록 하고 있는 인권위 조직 축소가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각 부처 파견 공무원이 아닌 전문직, 별정직, 계약직 등의 전문 채용인력이 구조조정 칼날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인권위의 전문성과 기능, 역할이 현저하게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시민들이 이제 막 인권의 영역으로 체감하기 시작한 노동인권의 영역은 정책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인권위의 더 적극적이고 정교한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에 우려가 깊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 인권 수준을 높이자고 국가가 만든 인권위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정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데 걸리적 거린다고 함부로 쳐낼 대상이 아니다.
이 정부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도 인권위는 동반자적 인식으로 존중하면서 함께 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정부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 이 글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간하는 <노동사회> 4월호(142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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