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두 나라에는 사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사립학교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영미권을 포함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도 우리와 같은 보습 혹은 입시 학원은 거의 없지만,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경비를 부담해서 자신들의 교육 이념을 추구하는 사립학교들을 사교육이라고 부른다. 성인들을 위한 사설 학원도 없었다. 이런 교육은 지방 자치 단체가 운영하는 문화 센터 같은 곳에서 담당했다. 즉 교육이라고 하면 모두가 당연히 공교육이었다.
교육은 공적 영역에 속한 일이다
이들은 우선, 교육은 사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사회경제적 신분 상승과 상품 가치를 높여 주는 것이고, 결국 개인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들의 돈을 들여서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교육은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적성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 주고,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지만 이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일이고,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무 교육 뿐 아니라 모든 교육은 다 국가의 세금으로 부담하고 있고, 나이에 관계없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배움이든 다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
▲ 현장실습 중인 학생.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고등학교만 마치고 사회에 나올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은 교육이 이뤄지는 게 핀란드, 스웨덴 사회의 특징이다. ⓒ<좋은교사> |
이는 단지 기회의 균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보정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초·중학교 단계에서는 그 학년에 해당되는 교육과정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장애 학생을 위해 보조 교사를 붙여서 모두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하려는 노력, 그리고 타 문화권 학생들이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언어와 문화뿐 아니라 자기 부모의 출신 언어와 문화를 배우도록 하는 배려 등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도록 함을 통해 자신의 소질과 적성, 능력에 따라 거기에 맞는 진로와 직업 세계를 준비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 체계를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교육은 삶의 한 과정이다
교육이 모든 아이들이 일정 나이의 시기에 거치는 하나의 사회라는 개념은 학교를 그 나이 아이들의 삶의 총체성을 담고 다루는 곳으로 만들어 가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즉, 이 두 나라의 공교육은 학교를 삶의 많은 영역 가운데 학습이 주로 일어나는 곳으로 이해하지 않고, 확장된 가정으로, 즉 아이들의 총체적인 삶과 생활이 이루어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생각은 일단 학교의 건물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있었다. 거의 모든 학교에서 학교의 중심에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고, 그 옆에 옷을 걸 수 있는 시설과 사물함들이 있으면서, 곳곳에 아동들이 쉴 수 있는 소파 등을 갖고 있어 학교의 크기와 관계없이 가정과 유사한 안정적인 느낌과 사람들이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는 요소들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교육의 상황에서 가르침뿐 아니라 삶에 대한 '돌봄', 의사소통과 상호 작용의 개념과 기능이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교육이 국가 경쟁력을 살릴 것인가?
이 두 나라의 공교육은 동일하게 국가 발전 전략과도 맞물려 있었다. 즉, 20세기 동안 이루어진 산업화와 지금 한참 진행 중인 정보화와 세계화라는 큰 흐름 가운데 기후가 좋지 않고, 인구가 많지 않은 나라가 생존할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들이 교육에 담겨 있었다.
이 가운데 이 두 나라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은 한 사람의 국민도 놓칠 수가 없고, 한 명도 뒤떨어지는 아이 없이 일정 수준까지는 끌어올리고,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적성,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 발전과 모든 국민들의 행복한 삶 영위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 사회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아이들도 성인이 된 후 다양한 직업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초중학교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에서 모든 학생이 일정 이상의 학력을 갖추도록 돕는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미래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모든 아이들이 서로 의사소통하고 협력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이를 교육의 매우 중심적인 요소로 반영하고 있었다.
공교육의 관료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렇게 국가가 중심이 되어 공교육을 이끌어가는 나라지만 두 나라 공히 관료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단위 학교와 교사 차원의 자율성이 매우 많이 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그 나라들이 가진 지방 자치의 전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전체적인 교육에 대한 재정을 책임지지만, 구체적인 교육 활동과 관련해서는 중앙 정부에서는 전체적인 교육의 목표와 교육과정 상에서 모든 학생들이 도달해야 할 개략적인 목표 수준을 정해 주면, 실제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교육과정을 짜고 어떤 교재를 선택하고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학교와 교사들의 몫이었다.
이를 위해 학교 내 교사들은 끊임없이 서로 논의하고 협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낙후된 학교 건물을 어떻게 새롭게 고칠 것인가, 그리고 학교의 교육 구조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들도 학교 구성원들의 몫이었다. 학교 구성원들이 끊임없는 논의 과정을 통해 최선을 안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지방 정부를 거쳐 예산을 받아서 시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학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고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끌어내는 구조를 갖는 것이 공교육 체제의 관료화를 막아 내는 핵심으로 보였다.
개방성과 유연성
학교와 교사 문화에 있어서는 개방과 유연성이 모든 학교의 수업과 교사들의 일상 가운데 배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교실이 밖에서 누구든 볼 수 있고,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최근에 지어진 학교들은 교실의 모든 벽이 유리로 된 곳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초중학교의 많은 수업이 주제 중심의 프로젝트 수업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실과 교사를 넘어 열려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수업 진행에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정한 교육과정을 제대로 배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놓고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무학년제도 많이 시행되고 있었고, 핀란드의 초중학교의 경우 보통 한 수업에 두 선생님이 들어가 가르치는데, 한 선생님이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그 시간에 수업이 비는 다른 교과의 선생님이나 방과 후 수업 교사가 보조 교사를 아이들의 학습을 돕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기초가 부족한 학생의 경우 또 다른 교사가 별도의 공간에서 지도하는 등 상당히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개방성과 유연성은 기본적으로 학교 내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이 포괄적으로 주어져야 가능한 것이고, 교육이 공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특정 교사가 특정 아이들과 영역에 대한 기본적인 책무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를 혼자만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효과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다른 교사들과 다양한 형태로 협력해야 한다는 의식과 문화의 뒷받침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합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북유럽 국가들의 공교육 이념과 실제 모습을 한국 교육에 적용하려고 할 때 제일 걸리는 부분은 우리 가운데 교육이 공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의식과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것이다.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경우 루터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이라는 의식이 1800년대 중반 이후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1900년대 들어서는 사회민주당이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국가가 책임을 지고 모든 사람을 일정 이상 수준의 기초 교육과 아울러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진로를 따라 후기 중등 교육과 직업 교육, 대학 교육을 받게 하는 체제를 만들어 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의 이념은 교육 뿐 아니라 노동 시장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민주주의와 평등 이념을 실현시켰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교육이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일이라는 전통이 국민 의식에 매우 깊게 박혀 있고, 이러한 전통은 사교육 열풍과 맞물리면서 최근 더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 체계 면에서도 국민의 삶에 대한 국가와 공동체의 책임을 약화시키고 모든 것을 개인과 시장에 맡기는 체제로 더 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부유하고 우수한 가능성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가난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더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공교육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 교육과 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과연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계속 나갔을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이렇게 나가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가? 등의 질문과 사회적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관료제 문화 해소를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한국에서 공교육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또 하나의 요인은 학교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박고 있는 관료제 문화다. 그러기에 이 교육 관료제 문화는 기본적으로 교육 행정 체계 속에 뿌리박혀 있지만, 교사 문화 가운데도 상당 정도 퍼져 있다.
이러한 교육의 관료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없을 경우 공교육 강화를 위한 투자는 결국 교육 관료들과 관료화된 교사 집단만 배불릴 뿐 실제로 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라는 공교육 이념을 실현하는 데는 미미한 효과만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결국 공교육 강화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없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 교육 관료 체계는 물론이고 교사 문화 가운데 뿌리박힌 관료적 요소를 걷어 내고 단위 학교와 교사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통해 공교육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은 공교육 강화를 위해 우리 교육이 시급히 해야 될 노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시범 실시되고 있는 교장 공모제를 확산하고, 교사들의 자발적인 운동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작은 학교 운동, 교육 실천 운동 등 학교 혁신 운동이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현 상황에서도 교사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 필요하다
현 교육적 상황에서라도 학교와 교사 문화를 어떻게 더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것도 교사 운동 차원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물론 현 체제 하에서 이러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고 한다 해도 그 수고에 비해 효과가 높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 체제 하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더 유의미한 학습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위해 현재의 기득권적인 아성을 깨뜨리고 상호 협력 하에 수업을 개방하고 유연한 방법들을 개발하고 시행해 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이러한 노력들이 역으로 학교와 교사들에게 자율권을 더 주는 쪽으로의 교육과정 개편과 관료제 축소의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 수 있고, 더 나아가 공교육에 대한 대폭적인 투자를 통한 우리 교육 개혁에 대한 희망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경우가 공교육이 나아갈 유일한 해답은 아닐 것이다. 이 두 나라도 교육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고, 그 나라 상황에서 끊임없는 논쟁과 새로운 시도, 교육 개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국가 단위에서 공교육은 무엇이고,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하는 모범과 방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도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을 통해 나름의 공교육의 이상을 실현해 가고 있다면, 우리도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각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가운데서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칠 일이다.
(이 글은 <좋은교사> 2009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