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 사실 그 어느 직업보다도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어야하는 것이 바로 발레리나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 임혜경은 분명 이지적이고 매혹적이며 화려하다. 그러나 가늘고 긴 체형과 이국적인 외모만이 뛰어난 발레리나 임혜경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녀만이 가진 무대 위 카리스마와 풍부한 감성을 완성시킨 것은 경험한 자만 알 수 있는 인고의 시간에 대한 '그 무엇'이다.
봄답지 않는 매서운 바람이 불던 3월 어느 날, 공연을 앞둔 발레 '라 바야데르'의 연습에 한창인 발레리나 임혜경을 찾았다. 임혜경은 연습을 막 마친 직후임에도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평정을 찾았다.
"발레리나로 산다는 것, 외로움과 환희의 양면성"
우선 연습 직후 제대로 휴식도 못하고 인터뷰를 진행해야 함에 기자는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임혜경은 웃으며 이렇게 답한다. "아녜요. 매일 있는 일도 아니고. 이런 것들이 나중에 무대에 서면 다 저에게 다시 되돌아오더라고요."
▲ ⓒNewstage |
관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발레리나지만 사실 관객과 만나기 전까지의 과정은 철저히 혼자다. "물론 동료는 존재하죠. 그렇지만 우리처럼 몸으로 하는 직업은 모두가 힘들어도 자신의 몸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스런 순간의 외로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유니버설무용단의 수석무용수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소위 '잘 나가는' 발레리나의 입에서 나온 멘트치고는 조금 의외다.
임혜경은 "공연 중 무대 뒤를 이동할 때마저도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을 느낄 때면 인간적인 면에서 좀 힘들어진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무대에 서게 하는 힘은 끊임없는 자기최면과 무대에 대한 열정이다. "과연 세계적으로 '백조의 호수'를 몇 명이나 제대로 출 수 있을까,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를 몇 명이나 소화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나는 현재 무대에 서고 있지만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자기최면이 생겨요. 발톱이 빠져서 걷기 힘들고, 등이 뻣뻣해져 눕고 싶은 때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스스로 위로를 받는 거죠."
덧붙여 임혜경은 "몸뿐만이 아닌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무용수로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했다. "불안한 상황에 있으면 무용수들은 바로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스스로 신나서 춤을 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대에 섰을 때 내 파트너는 다름 아닌 관객이거든요. 관객은 무용수 개인의 에너지를 받는 거지만, 무대 위의 무용수는 수백, 수천 명에게 에너지를 나눠줘야 해요. 그만큼 숨도 깊어야하고, 에너지도 넘쳐야하는 사람인 거죠. 그러다보니 자기 스스로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딸에게 보다 넓은 세상 보여주고 싶은 천상 엄마 임혜경"
"아기를 낳던 순간은 무대 커튼콜의 기립박수를 받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 여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이었어요." 사실 임혜경은 '발레리나'와 '7살배기 딸을 둔 엄마'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명찰을 동시에 달고 있다.
발레리나에게 있어 출산이 금기사항이라는 점에 대해 그녀 역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임혜경에게 있어 출산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기를 낳는 날까지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연습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노력들도 아기를 낳고 난 뒤에는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고요. 말 그대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머리로는 기억하는데 몸이 따라오지 않는 괴리감에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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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어떻게 출산 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임혜경의 대답이다. 말이 쉽지 출산 후 5개월 만에 주역무용수로서 다시 무대에 오르기 위해 그녀는 연습에 또 연습, 오로지 춤만 췄다. "지금 같아서는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웃음). 그런데 그 당시에는 단지 무대에 서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못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론다 번'이 쓴 '시크릿(Secret)'에 보면 1%의 부정적인 생각이 우주의 기를 받아서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하더라고요. 저야말로 그 당시 갖고 있던 긍정적인 생각이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무용수로서 가장 컨디션이 좋을 나이인 30대 초반 출산을 감행한 점에 대해 아쉬움은 없었을까? "만약 아기를 낳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도 해보지만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임혜경의 얘기다. "전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이잖아요. 물론 그 특별함이 10바퀴를 돌 수 있는데 20바퀴를 돌 수 있게 함을 말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무대에서 보이는 모습과 평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용만 해서는 소통할 수 없는 것들을 관객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아이 얘기를 꺼내자 입가에 옅은 미소가 머금어지는 임혜경은 천상 엄마다. 딸에게도 발레를 시킬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임혜경은 "아이가 스스로 판단해서 진심으로 발레를 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제가 살아온 발레리나의 삶이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을 희생삼아 무대에서 꽃을 피우는 직업이다 보니 딸에게는 좀 더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죠. 좀 더 활동적이고, 좀 더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대작 <라 바야데르>, 지금 놓치면 또 5년을 기다려야"
임혜경은 오는 4월 17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는 발레 대작 '라 바야데르'에 인도 무희 '니키아' 역으로 무대에 선다. 이 작품은 임혜경이 출산 5개월 만에 공연했던 작품이라 더 의미가 깊다. 더욱이 그녀는 이 작품의 한국 초연부터 줄곧 함께한 '원조 니키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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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팬들에게 '니키아=임혜경'은 공공연한 공식이다. 그만큼 국내에서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를 소화하는데 그녀만한 적역이 없다는 얘기다. "작품 속에서 '니키아'는 해석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캐릭터예요. 클래식 발레의 앳띠고 순수한 상징적 이미지에 능동적이고 현대적이 모습이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 '니키아'거든요. 연기력을 많이 요구하는 작품이라 더 어렵습니다."
왜 굳이 '임혜경'인가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이지적인 외모 덕도 있다"고 귀띔했다. "키도 크고, 외모 자체가 이국적이다 보니 '니키아'가 가져야하는 이미지에 부합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 이미지화가 된다는 것은 무용수에게는 큰 행운이죠. 좀 더 쉽게 캐릭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무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얘기거든요."
인터뷰 말미에 임혜경은 발레 공연 관람을 망설이는 관객들에게 경고 아닌 경고(?)를 보냈다. "이번 작품을 놓치시면 정말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워낙 대작이라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거든요.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보니 무용수들의 마음가짐도 남다릅니다. 그게 아마 무대에서 다 표현될 것 같아요. 특별한 공연을 봤을 때 그 감동도 더욱 특별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발레를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각자의 철학으로 즐기신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공연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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