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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은 힘으로 풀리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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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은 힘으로 풀리지 않는데…"

[화제의 책] 강영진의 <갈등 해결의 지혜>

▲ <갈등 해결의 지혜>(강영진 지음, 일빛 펴냄). ⓒ프레시안
"갈등은 힘으로 풀리지 않는다. 오직 지혜로만 풀 수 있다."


지난 25일 검찰이 <PD수첩>의 이춘근 PD를 긴급 체포했다. 긴급 체포 소식을 전해들은 그날 밤 기자의 가방 안에는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갈등 해결의 지혜>(강영진 지음, 일빛 펴냄).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증폭'하는 행동이 '법치'의 외피를 쓰고 횡행하는 시대에 이 책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지은이부터 주목하자. 지은이 강영진은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갈등해결학의 '한국인 1호 박사'다. 미국 버지니아주 대법원 인증한 전문 중조(仲調·Mediation)인으로 미국에서 갈등 해결 실무를 쌓기도 했다.

<갈등 해결의 지혜>는 지은이가 지난 10년간 학교, 현장에서 배운 갈등 해결을 둘러싼 온갖 내용을 요령 있게 정리한 책이다.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다양한 갈등과 해결의 사례를 통해서 갈등 해결 방법과 갈등의 예방법을 소개한다. 확신하건대, 앞으로 갈등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거쳐야 할 것이다.

갈등 해결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갈등 해결의 지혜>는 가장 효과적인 갈등 해결 제도로 '중조' 제도를 제시한다.

중조는 갈등 당사자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제3자(중조인)가 중간에서 돕는 일이다. 당사자들이 주체가 돼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법원과 같은 결정권이 있는 기구가 갈등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조정(調停·Conciliation)'과는 다르다. 중조 과정에서 모든 결정은 당사자의 몫이다.

이 중조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1970년대 이후 가장 대표적인 갈등 분쟁 해결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중조 기법을 익힌 중조인이 당사자가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 단계부터 최종 화해 단계까지 전 과정을 주관한다. 굳이 중조인이 아니더라도 중조 훈련을 받은 이들이라면 학교·직장에서 누구나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

실제로 뉴욕 롱아일랜드의 브라이언트 고등학교를 비롯한 약 1만 곳의 미국 학교는 '또래중조(Peer Mediation)' 프로그램을 시행해 큰 효과를 보았다. 이 책에서 소개한 보스턴의 한 학교는 (동시에 좋아하는 여학생을 둘러싸고 칼부림을 할 정도로) 학교 폭력이 빈번했지만 이 또래중조 프로그램을 통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 중조의 합의 성공률은 대개 80% 안팎으로 아주 높은 편이다. 설사 중조 과정에서 최종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실패로 볼 수 없다. 중조 과정에서 당사자가 여러 가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덕분에 갈등의 양상이 달라지거나, 앞으로 갈등을 해결할 단초가 마련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립'이란?

안타깝게도 <갈등 해결의 지혜>는 불행한 책이다. 글머리에 언급한 대로 이 책이 놓인 한국 사회의 상황이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와 공명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은이 역시 이런 점을 깊이 고민한 듯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갈등 해결 전문가가 늘 고민해야 할 것으로 '중립성' 문제를 거론한다.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예약돼 있다."

지은이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이 글귀를 화두로, 중립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갈등 해결 전문가로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한다.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의문일 때도 적지 않다."

지은이는 중립을 지키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한 쪽 편에서 함께 싸우는 게 옳은지를 놓고 두 가지 나름의 기준을 제시한다. 바로 '정의'와 '힘'이다. 먼저 정의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석유, 중동 전략 등의) 이해관계(Interests)를 위해 이라크 사람들의 기본적 니즈(Needs)를 짓밟은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처럼, 이익을 추구하는 쪽의 정당성이 약할 때, 필요한 것은 니즈의 침해 상태가 해소되도록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중립을 포기하고 니즈를 침해당한 쪽에 서서 힘을 보태고 때론 함께 싸우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의이고, 진정한 갈등 해결의 길이라 믿는다."

둘째, 힘의 문제.

"갈등 당사자 간에 힘의 불균형이 심할 때 중간에 있는 사람의 고민은 커진다. (…) 할 수만 있다면 강한 자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힘든 일이다. (…) 하지만 약한 이들에게 힘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그 역시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단기적으로, 부분적으로, 절차적으로 중립성이 흔들린다 해도 감수하고 극복해야 할 일이다."

지은이가 내놓은 이 두 가지 기준에 비춰 봤을 때, 광우병 감염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나 용산 참사 등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갈등은 과연 전문가, 더 나아가 지식인의 중립을 용납하는가? 지금 경계 긋기의 어려움을 핑계로 침묵하는 이들을 위한 사후의 자리는 어디인가? 갈등 해결 전문가로서 한국 사회에서 그의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될 전망이다.

갈등이 상처로 남지 않는 세상

"한 택시기사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고 동료들에게서까지 따돌림을 받다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막는 예방적 중조(Preventive Mediation)도 센터의 중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테면, 이렇게 하는 것이다.

괴로워하던 택시 기사가 센터의 문을 두드린다. 사정 얘기를 들은 중조인은 택시회사 측과 기사들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듣고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다. 필요하면 그 기사와 회사 측 대표, 그리고 다른 기사들도 자리를 함께 한다. 그 기사가 회사 측의 조치나 동료들의 태도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다른 이들이 알도록 한다.

서로 간의 오해를 해소하도록 하고, 억울한 일이 있었다면 바로 잡을 길을 찾는다.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고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수도 있다. 혹 완전히 풀진 못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고민을 덜고 한 생명을 살리고 한 가족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갈등 해결의 지혜>는 '갈등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갈등이 상처로 남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국의 각 지역마다 갈등해결지원센터가 설치돼, 가족·이웃·직장·지역 사회에 문제가 있을 때 적은 비용으로 누구나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정에서 살림하거나 직장에서 은퇴한 이들이 갈등 해결, 중조 훈련을 받고 바로 이 센터에서 전문가(중조자)로 일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의 꿈이 이뤄질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갈등 해결의 지혜>를 통해 지은이가 꿈을 이루고자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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