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리스트'가 있단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금품을 건넨 정관계 인사 70여명의 명단이란다. 여야의 국회의원,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거명된 리스트란다.
'장자연 리스트'가 있단다. 고 장자연 씨가 소속사 대표의 강요에 못 이겨 술 접대와 성 상납을 한 인사 10여명의 명단이란다. 방송계와 기업계 인사뿐만 아니라 유력언론사 대표까지 거명된 리스트란다.
차이가 있다. 똑같이 '리스트'라고 이름 붙여졌지만 실체는 다르다. '박연차 리스트'는 없다. 박연차 회장이 검찰 앞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진, 또는 정황이 잡힌 인사들을 통칭하는 것일 뿐이다. '장자연 리스트'는 있다. KBS가 입수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고 장자연 씨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잠정결론 내린 문건에 실명과 직책 등이 기재돼 있다. 시중에 떠도는 출처불명의 리스트를 빼면 이렇다.
차이가 하나 더 있다. 검찰은 열심히 뒤진다. 박연차 회장을 압박해 정관계 인사들의 이름을 하나 둘 진술하게 만들고 있다. 경찰은 은근히 뺀다. 처음엔 "문건내용에 폭행·성 강요·술자리 강요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돼 있다"고 했다가 이제 와선 "경찰이 확보한 리스트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납득할 수가 없다. '박연차 리스트'와 '장자연 리스트'는 본질상 같다. 먹이사슬구조의 정점에 있는 유력인사가 불법적으로 상납을 받았다는 점에서 두 리스트는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상납 품목이 하나는 금품이고 하나는 성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행위의 질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경찰은 뒤로 뺀다. 검찰은 열심히 뒤지는 반면 경찰은 차려준 밥상마저 뒤로 물리려 한다. 그래서 납득할 수가 없다.
납득할 순 없지만 정리할 순 있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의지를 저울에 올려놓을 수 있다. 한쪽의 용기를 높이 사고 다른 한쪽의 눈치를 성토할 수 있다. 하지만 섣부르다. 삐져나온 현상만 갖고 서둘러 결론내리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정치권에서 볼멘소리가 나온다. '박연차 리스트'가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언론에 의해 보도된 '박연차 리스트'엔 박근혜계 인사와 친노 인사만 거명돼 있다. 여당의 주류 인사는 쏙 빠져있다. 그래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수사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바로 이게 예단을 경계하는 이유다. 정치권에서 나도는 의혹 또는 음모론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검찰과 경찰의 수사의지를 저울로 재는 건 무의미해진다. 오히려 검찰과 경찰 모두 유력인사의 위세에 눌려 '트위스트 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할지 모른다. 두 곳 모두 지극히 정치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지적 말이다.
이렇게 짚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일지 모른다. 다른 여러 가능성, 즉 실제로 이명박계 유력인사가 금품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 유력언론사 대표가 성상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의도 정치에 부정적인 이명박 대통령이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차제에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더라는 보도도 나오는 판이다. 아무튼 지켜볼 일이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일이다. 검찰과 경찰의 '트위스트 수사'를 동시에 감상해야 하는 경우도 상정해야 하고 또 다른 '저울재기'도 준비해야 한다. 권력실세와 유력언론사 대표 중 어느 쪽의 힘이 더 센지를 재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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