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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똘레랑스'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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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똘레랑스' 아직 멀었다

[박동천의 집중탐구]<14>이기심은 민주주의의 바탕이다

제2절 이기심은 민주주의의 바탕이다

다시 군자/소인 구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군자가 되지 않고 소인이 되겠다고 공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군자보다 소인이 더 낫다고 공언할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성인인구 약 3500만 명 중에 군자가 몇이나 될지를 물어보면, 여론조사에서 어떤 답이 나올까? 절반을 넘거나 절반에 가깝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절반은커녕 10%, 350만 명의 군자가 한국에 산다고 볼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군자는 공자의 시대에도 무척 드물었나보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패를 짓지 않고, 소인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서로 싸운다" (『論語』, 「子路」, 23)고 했는데,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싸움판으로 접어들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군자들이 많이 살았다면 그럴 리가 있었겠는가? 요즘 세상도 도처에 화합보다는 갈등 또는 경쟁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소인배들이 많이 사는 세상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바로 그 소인배들을 배제하지 않는 정치질서를 말한다. 인류의 역사를 대략 오천년이라고 할 때, 지성과 덕성이 뛰어나다고 자처하신 분들이 정치를 독점한 시대가 아무리 짧게 잡아도 4700년은 된다. 그리고 그 분들이 정치를 전담하던 시절에 지금보다 갈등이나 경쟁이 적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지금 세상이 시끄럽다고 민주주의를 탓하는 사람은 신분사회에서 인구의 90% 이상이 입을 닥치고 허리를 굽히고 고분고분 노동이나 해야 맞아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을 지경이었던 것을 조용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과잉을 우려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87년 이전을 동경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신분사회나 전체주의로 돌아갔을 때 자기가 지배계급에 속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이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어딘지를 되새겨보지도 않고, 단지 세상이 좀 소란스럽다는 점이 불안해서 반동의 조류에 몸을 내던진다는 것은 무지로 말미암은 무책임일 뿐이다. 소란은 자체로 악이 아니다. 단지 활력이 넘치는 신호일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란을 곧 악으로 여기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두 항목 사이에 네 갈래 관계가 있음을 보지 못한 단견 때문이다. 군자/소인의 구분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소인에 속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근거 없는 복고주의적 허영심에 빠져서 마치 군자인 척하려는 심성에 큰 원인이 있다.

민주주의는 인민 다수가 반드시 군자이기를 기대하고 출발하는 정치가 아니라 다수가 소인밖에 못되더라도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예방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정치다. 물려받은 문벌과 재산을 곧 개인적 덕목의 증거라고 여기는 귀족들의 정치가 아니라, 비록 자랑할 것은 별로 없지만 가진 것은 모두 자기 손으로 일군 평민들의 정치인 것이다. 서양근대를 논할 때 자주 운위되는 이른바 이기심의 해방 또는 욕구의 해방이라는 것이 그런 뜻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물욕, 정욕, 지배욕과 같은 세속적인 욕구가 전면적으로 봉쇄된 시대나 사회는 별로 없다. 근대 이전과 근대 사회의 차이는 지배계급의 위선이 허용되었느냐 아니면 폭로되었느냐에 있을 뿐이다. 즉, 근대 이전에는 지배계급만이 물욕과 정욕과 지배욕을 누리고, 동시에 나머지 민중에게는 도덕적 종교적 설교를 통해 그런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던 반면에, 근대 사회에서는 그런 위선이 폭로된 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금욕을 강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욕구를 어차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 중요하다.

신분사회는 피지배계층의 기를 죽여야 유지된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모순이 지탱되려면 다수에 속하는 개개인에게 기백 비슷한 것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백이란 다시 말하면 욕구고 야심이다.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욕구, 지금보다 잘 살고 싶은 욕구, 쌓인 원한을 풀고 싶은 욕구, 등이 곧 야심과 기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성정이 자라다보면 당연히 현실체제의 부당한 측면에 의문을 품고 권력에 대해 도전하려는 데까지 이어질 수가 있다. 신분사회에서 특권계급은 이런 불온한 야심의 싹을 뿌리 뽑기 위해서 모든 욕구는 죄악이라고 민중에게 주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인민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활발하기는 어렵다. 힘들여 농사를 지어도 소출 대부분을 지주가 가져간다면, 피땀 흘려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해도 이윤은 대부분 자본가 차지가 된다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날 리 없는 것이다.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는 문제는 자연의 질서가 아니고 사회적 질서로서, 정치를 통해서 정할 문제다. 지주에게는 지대, 자본가에게는 이윤, 노동자에게는 임금이 각각 정당한 몫으로서 인정된다는 자체로 이미 기득권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지대와 이윤과 임금 사이의 분배비율을 정치적 합의를 통해서 정하는 일은 특별히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논거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세상에 크게 퍼뜨린 역할은 물론 아담 스미스 및 그를 계승한 영국의 자유경제이론가들이 수행했다. 리카도, 맬서스, 벤담, 제임스 밀, 리차드 코브덴, 존 브라이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이 그렇고, 20세기에는 이 생각이 미국과 유럽과 일본으로 전파되어 현대정치학과 경제학의 기본 전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스미스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이미 18세기 프랑스에서 이른바 중농주의 학파라 불린 사람들이 욕구의 해방을 역설했었다. 그때 사용한 그들의 구호가 "내버려 둬라"(laissez-faire) 또는 "너무 많이 다스리지 마라"(pas trop gouverner)이다.

중농주의자 구르네(Gournay, 1712-1759)는 "저절로 지나가게 내버려 둬라. 세상은 저절로 굴러간다"고 주장했다. 아르장송 후작(Marquis d'Argenson, 1694-1757)은 이렇게 외쳤다: "내버려둬라, 이것이 모든 공공권위의 좌우명이 되어야 한다. … 우리 이웃을 깎아내리는 것 말고는 우리에게 성장할 길이 없기를 바라는 가증스러운 원칙! 그런 원칙에 만족하는 자들의 가슴에는 심술과 악의밖에는 없고, 이익은 없다. 내버려둬라, 빌어먹을! 내버려두란 말이다!!"

남이 불행해지는 만큼 내가 행복해지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감은 가장 저질이고 가장 불쌍한 행복일 것이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것이 좀더 고상하고 좀더 건강한 행복이다. 그러려면 모두가 상대방을 공격해서 뺏어먹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거리를 찾아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지대를 뜯어먹는 부자는 어차피 놀고먹으니 논외다. 이윤을 가져가는 자본가는 돈 버는 일이 취미이므로 방해만 안 하면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인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일할 의욕을 심어주는 데에 자본주의 경제학의 열쇠가 있다. 이 이치를 마키아벨리는 이미 16세기에 포착하고 주장했다.

"결혼이 자유롭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저축한 부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걱정 없이 부부마다 부양할 수 있는 만큼 아이를 낳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라고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며 각자 능력만 있다면 고위직에도 오를 수 있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난다.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모든 시민이 자발적으로 부를 늘리고, 스스로 향유할 수 있다고 믿는 재물을 획득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부가 증가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나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나 서로 경쟁하면서 일하기 때문에, 사익과 공익이 모두 경이적으로 성장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로마사 논고』(제2권, 제2장)

사익은 그렇다 치고 공익이 어떻게 경이적으로 성장하는지는 다음 절에서 다룰 테니 잠시만 참아주기 바란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결국 외래종 배스더러 토종 붕어를 잡아먹고 여우더러 토끼를 잡아먹으라는 소리 아니냐는 의문도 다음 절까지만 기다려주기 바란다. 그보다 먼저 지금 하는 논의를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의 해방, 욕구의 해방이란 다른 말로 하면 관용(寬容) 또는 관인(寬忍)의 정신과 연관된다. 홍세화 씨를 비롯한 여러 저자들의 노력으로 이제 한국사회에도 똘레랑스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똘레랑스라는 말이 유포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일상생활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머나먼 여정이 남아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진영은 물론이고, 진보진영에서도 똘레랑스가 핵심적인 가치로 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적으로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이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개탄하는 것 자체가 똘레랑스의 부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똘레랑스가 생활의 원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 염려를 해소해야 한다. 관용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문제제기이다. 보수파 중에서 좀 영리한 사람들은 이를 "불관용을 관용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문을 통해서 표현한다. 관용을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관용할 수 없는 대목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불관용은 불가피하며, 따라서 관용의 원리란 자가당착이라는 말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해서 관용의 원리를 쉽게 포기하면서, 자기가 행하는 불관용을 정당화한다.

이 대목에서 관용과 관인을 구분하고, 관용보다는 관인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생각을 나는 영국의 보수파 작가 콜리지(Samuel Coleridge, 1771-1834)에게서 얻었지만, 영어 단어로는 혼동만을 일으킬 테니 그냥 한국어로 요지만을 말한다.※
※주) 콜리지는 관인(toleration)은 법의 원리로 필요하지만, 관용(tolerance)에는 반대했다. 그가 의미하는 관용은 자신의 신조에 반하는 주의나 주장을 용납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Samuel Taylor Coleridge, "The Friend, vol. I", Collected Works of Coleridg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91-99.

관인(寬忍)이란 참고 넘어가주는 경계를 가리킨다. 관인의 경계 바깥은 따라서 범죄로 처벌해야 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관인의 경계 안에 있는 일이라고 해서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법에 어긋나지는 않으니까 마지못해 참고 지켜보면서 넘어는 가지만, 역겹다면 역겨운 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고, 보기 싫은 상대를 억지로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 관인하지만 관용하지 않는 영역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불관용이란 무력에 의한 억압이나 박멸이 아니라 말과 글을 통한 적극적인 비판과 성토다. 언어로 표현되는 반대나 논박은 관인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 점을 분명히 한 다음에 콜리지는 틀렸거나 해롭다고 생각되는 의견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가 보기에 잘못된 생각을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오히려 그것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력을 써서 탄압하거나 은밀한 방법을 써서 입을 닥치게 만들면 기본적인 법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평화적인 방법이나 절차를 통해서 거부감이나 반감을 표현하는 것은 관용을 하지 않는 것이지 관인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적 폭력을 동원하거나, 또는 권력에 기대서 반대의견을 말살하려 들지만 않으면 관인의 원리가 지켜지는 셈이다. 물론 특권계급이 정치권력을 사유화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법률을 악용한다면 관인의 원리가 설자리는 애당초 없다. 그러므로 관인의 원리는 곧 법치주의와 통하고, 모든 종류의 전횡에 대한 저항을 함축한다. 이미 관용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정착된 상태에서 용어를 바꿔야 한다고까지 주장할 생각은 없다. 단, 용어는 어떻게 쓰든지 내면의 의미는 참을 인자 "관인"에 초점이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바란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전라도 주민들은 어떤 정치세력을 관용하지는 못하지만 관인은 하는 것이다. 경상도 주민들도 어떤 대상을 관용하지는 못하지만 관인은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주민들이 보이는 불관용의 태도, 즉 반감이나 적대감 역시 관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투표행태를 관용하지 말고 비판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단, 그들의 투표 행태를 관인은 해야 한다.
▲ 전라도와 경상도 주민들이 보이는 불관용의 태도, 즉 반감이나 적대감 역시 관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투표행태를 관용하지 말고 비판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단, 그들의 투표 행태를 관인은 해야 한다. 사진은 1987년 김대중 후보의 여의도광장 유세 모습. ⓒ연합뉴스

지난 20여년 간 수많은 글과 말을 통해 이루어진 지역주의 성토도 폭력을 사용한 것은 아니니, 불관용일 뿐 관인은 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지금 지역주의 성토를 관용하지 않을 뿐, 관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신조에 반대하는 의견이 존중 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려면 초점이 분명해야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민들이 상당히 다른 대상을 겨냥해서 반감을 표명하는데, 그 차이를 뭉뚱그려서 그냥 반감을 표명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반감은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두 종류의 반감에 대해 나름대로 일관된 입장도 밝히지 못하면서, 그냥 "지역감정"이라는 뭉뚱그림으로 얼버무린다는 것은 두 지역 주민 모두에게 불쾌한 기억을 연장시킬 뿐이다.

근대 민주주의 원리는 이기심을 배척하는 발상이 아니라 이기심을 소재로 삼는 발상에서 비롯한다. 각 개인이 자기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후보나 정책을 지지하도록 한 다음에, 표를 집계해서 다수결로 정권 담당자를 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개인 중에는 눈앞의 이익만을 고려할 사람도 있고, 백년대계를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며,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이익을 올바르게 산출해 낼 사람도 있겠지만, 착각이나 무지 때문에 계산을 잘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다. 이 모든 변수들을 일일이 가려서 잘못된 표는 빼고 제대로 찍은 표만 집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바른 표와 틀린 표를 가릴 방법도 없거니와, 애당초 정치적 의견에 관해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의 반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귀족들은 무지몽매한 무지렁이들이 참정권을 행사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지리라고 염려했다. 종전의 압제에 비해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뒤뚱거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에 비해서 효율성이나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증거는 전혀 없다. 현재 OECD국가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인민의 자유로운 정치참여를 어떤 식으로든 탐탁찮게 여기는 나라는 경제적으로도 뒤처진다는 증거다. 인민의 자유로운 정치참여란 각 개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나 정당에게 자기 맘대로 투표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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