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유보금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정치권의 협박(?)과는 달리 현장 관계자들은 "과거 힘없이 무너지던 사태를 되풀이할 수 없다"며 앞으로도 자금 확충에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선 '빅3' 신규수주 1척
현장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지난해보다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게 대기업 관계자들의 말이다. 수출이 갈수록 어려워져 사내에 현금을 돌리기가 어려워졌다는 설명이다.
실제 지난 수년 간의 고속성장으로 IT제품을 제치고 수출 1위 품목으로 오른 조선업체마저 최근 들어서는 일감을 전혀 따내지 못하고 있다.
▲한때 국내 산업계 최고의 수익성을 뽐냈던 대형 조선업체들도 경제위기 한파를 맞고 있다. ⓒ뉴시스 |
이 때문에 이들 3사는 모두 회사채·CP 발행을 이미 실시했거나 앞으로 계획 중이다. 지난 7년 간 이어온 무차입 경영 시대가 끝난 셈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2002년 이후 7년 만에 처음으로 최대 1조 원가량의 회사채 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중공업은 이미 지난 달 7000억 원 규모의 CP를 발행했다. 현재는 2950억여 원 정도 남은 상태다. 시장에서는 대우조선해양이 앞으로 최대 2조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에 나설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6일 "현재 현금성 예금이 2조5000억 원 정도 있다. 사내 돌려야 할 현금은 물론 선박건조작업에도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정기예금을 깨는 것보다 채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조선업체만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공격적인 경영으로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는 현대기아차그룹은 올 들어 2조 원에 달하는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공격적 경영에 따른 위험대비책이다.
LG·SK·한진·롯데 등 주요 재벌그룹 역시 최소 50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채권시장에서 조달했다. 수출길은 막혔는데 환율상승으로 원자재 조달비용은 급증하니 현금흐름에 언제 이상이 생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채권시장에 낯선 이름들을 다시 올리는 셈이다.
자금조달 '비상'…CB·BW에도 눈길
이처럼 대기업 집단이 채무를 대거 늘림에 따라 부채비율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삼성·현대차·현대중공업·LG·SK·금호아시아나·GS·한화·롯데·한진 등 10대 재벌그룹 상장사(금융계열사 제외)의 지난해 말 부채비율 평균은 101.9%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07년 말 84.3%에 비해 20%포인트 가까이 높아진 것이며, 118.2%를 기록한 지난 2003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100%를 넘은 것이다. 한진그룹은 278.7%로 전년대비 80%포인트 넘게 올랐고 한화그룹 역시 20%포인트가량 오른 165.5%에 달했다. 삼성그룹 역시 59.1%에서 77.7%로 부채비율이 늘어났다.
부채비율이 급격히 늘어나는데 따르는 부작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 재무구조가 부실해지면 기업가치평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현금흐름도 갈수록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기차입금이 많거나 신용등급이 낮아 회사채 발행이 여의치 않은 일부 기업은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에 현금조달을 의존하고 있다.
CB와 BW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인수권자가 일정 금액으로 발행주체 주식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사채다. CB는 말 그대로 사채를 기업 주식으로 전환하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며 BW는 기업이 발행하는 신주를 인수할 권리(워런트)를 가진 사채다.
CB와 BW는 주로 코스닥상장사가 애용하는 대표적 자금조달 도구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양새다. 과거 외환위기 시절 대기업들은 자금조달을 위해 이들 사채를 대거 발행한 적이 있다.
코오롱은 지난 달 27일 1000억 원 규모의 BW를 발행했으며 기아자동차도 4000억 원 규모의 BW 발행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닉스는 BW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에 시달리자 해명에 나서기까지 했다. KCC는 CB 액면총액을 2000억 원에서 5000억 원으로 늘리는 등 사채발행한도를 늘려 만일의 사태에 전면 대비하는 태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주주권을 담보한 사채라는 점에서 주주 지분율에 변화를 미치는 등 기업으로서는 감내해야 할 부담도 그만큼 크다. 대기업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보다 큰 위험을 무릅쓰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서는 기업의 현금조달 수요가 커지면서 보통 회사채에 비해 낮게 거래되던 이들 주식연계 사채 발행금리가 일부에서는 오히려 회사채보다 높은 경우도 있다. 그만큼 조달비용 부담도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간부는 "대기업마저 CB·BW 발행에 나섰다는 것은 경제위기 여파가 이미 한국 실물 부문에 심각한 수준으로 번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자금 사정이 빡빡하다고 하는 말이 결코 볼멘 소리가 아니다"고 했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회의실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박희태 대표와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 대표는 전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시킨 후 재계에 투자확대를 주문했다. ⓒ뉴시스 |
"시장 친화적 정부 맞습니까"
기업 현장의 아우성과는 달리 여당은 기업의 투자를 독려하고 나섰다. 돈을 빨리 풀어서 경기를 살려달라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으로서 어찌보면 당연한 태도다. 내년 지방선거를 감안하면 사실상 정부로서는 올해가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더군다나 고용불안 문제는 향후 한국경제 위기를 더욱 자극할 뇌관이다. 어떻게든 고용여력이 큰 대기업이 대규모 채용에 나서줘야만 정부가 목표한 고용 창출과 성장률 하락 방지를 실현할 수 있다.
지난 3일 재벌기업의 대표적 요구사항 중 하나이던 출자총액제한제도가 23년 만에 폐지되자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마치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듯 "출총제 폐지는 경제계에 약속한 것이고 대기업의 투자여건을 좋게 만들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법이다. 대기업들은 금고문을 활짝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여당의 주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당장 박 대표는 지난 달 19일에도 "대기업들이 100조 원을 금고에 쌓아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며 기업이 투자를 안 한다고 볼멘소리를 한 바 있다.
재계는 당장 반박에 나섰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고용 창출을 위한 투자에 나설 수 있겠느냐는 설명이다.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지난 2일 <매일경제> 기고 '사내유보금은 현금이 아닙니다'는 글에서 작심한 듯 여당의 요구에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일부에서는 기업이 갖고 있는 사내유보금을 일자리 창출에 사용해 달라고 한다"며 "사내유보금이라니까 기업 경영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금고에 쌓아 둔 현금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사내유보금이 넘쳐난다는데 오히려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회사채 발행에 힘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며 여당의 요구를 은연 중에 비판했다.
김용옥 전경련 금융조세팀장은 "상장사 전체 사내유보금 393조 중 현금성 자산은 18%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부 운용자금, 결제자금 등에 매달 써야 할 돈"이라며 "과거 외환위기 때 수많은 기업이 자금융통에 어려움을 겪어 흑자도산한 선례를 (정치권에서) 벌써 잊은 것 아닌가 싶다. 기업들은 그때 공포로 인해 비상시를 대비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압박이 두렵다며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현재 경기 하락 속도가 너무 빠르다. 수출부문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추락하는 상황"이라며 "이 둔화속도가 아직 기업부문에 100%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점차 악영향을 키울 것이다. 기업은 향후 경기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권시장은 활황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건수가 늘면서 채권시장 분위기는 훈훈하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져 갈 곳을 잃은 시중자금이 채권시장을 눈여겨보게 된 데 더해 대기업이 회사채 발행 규모를 늘리면서 우량회사채가 시장에 대거 풀렸기 때문이다. 5일 기준으로 국고채 3년물 금리는 3.71%지만 AA-등급 회사채 3년물은 6.28%에 달한다. CD 3개월물(2.49%), 통안증권 3개월물(1.71%), 산금채 1년물(3.06%) 등 어떤 채권보다 수익률이 높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달 전체 회사채 발행 규모는 8조2000억여 원으로 지난 2001년 12월(8조5000억 원) 이후 7년 2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거래량 역시 3조2000억 원 증가한 15조6000억 원에 달했다. 통안증권과 특수채 등의 발행 증가율은 20%대에 그쳤지만 회사채 발행 물량은 8조2000억 원으로 전월대비 2조6000억 원(46.2%)이나 증가했다. 발행 주체로 기업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신동준 금융투자협회 채권시장팀장은 "작년 말 공포분위기가 한창일 때는 소화되지 않던 카드채나 캐피탈 등도 올해 들어와서 점점 매기가 살아나는 추세다. 지금은 회사채 A등급까지도 활발히 거래되고 있다"며 "무위험 투자대안의 기대수익률이 워낙 낮다보니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높으면서도 수익률이 좋은 회사채·CP 등에 시장의 관심이 커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기업의 현금확보 수요와 투자자의 심리가 경제위기를 매개로 절묘하게 결합된 셈이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전통적 채권투자자인 기관투자자뿐만 아니라 개인투자자들마저 채권시장 투자를 늘리고 있다. 회사채 비중이 높은 채권형 펀드는 물론 직접 투자비중도 늘어나는 추세다. 채권영업에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동양종금증권의 지난 1월 소매판매액은 6300억 원으로 월 기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 기준으로는 1조2000억 원이 넘었다. 월 평균 판매액의 두 배가 넘는 실적을 올린 것이다. 강성부 동양종금증권 연구원은 "기관투자자들은 아직 위험등급인 BBB급을 꺼려하는 분위기지만 리테일 부문에서는 상당히 아랫등급까지 거래되는 게 사실"이라며 "그 동안 거래가 되지 않던 채권마저 거래대상이 되면서 오히려 채권 수익률에 위험수준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우량 회사채와 비우량 회사채 간 수익률 차이가 커지는 모습"이라고 했다. 박태근 한화증권 연구위원은 지난 1일 보고서에서 "최근 회사채 발행증가는 투자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경기침체 장기화에 대비한 기업의 운전자금 선수요 욕구 때문"이라며 "BBB 등급 채권에서 일부 과열징후가 있는데 (경기 불투명성을 감안할 때) 이들 업종에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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