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여당이 3일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제한하는 금산분리 완화와 관련된 은행법과 재벌의 문어발식 투자를 제한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관련된 공정거래법 통과를 강행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내세운 명분은 경제위기 대응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금산분리 완화와 출총제 폐지는 재벌체제를 더욱 공고화시킨다는 점에서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일종의 국가 속의 국가인 거대 재벌에 국가 경제가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종인 박사는 "4800만 국민이 몇몇 기업 집단에 의존해서 생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굉장히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 기업은 언제가 무너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오기 전까지 미국의 씨티뱅크, GM 등의 몰락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김종인 박사는 "국가를 경영하는 이들이 기업 프렌들리를 얘기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시장친화적'인 것과 '기업친화적'인 것은 매우 다른 얘기다. 기업은 시장의 여러 주체 중 하나라는 점에서 '기업친화적'인 태도는 오히려 '반시장적'이다. 이날 연재분을 위한 대담은 지난 2월 11일 김종인 박사의 개인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편집자 |
▲ 김종인 박사 ⓒ프레시안 |
전성인 : 오늘은 대략 세 가지 정도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첫째,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새로 취임했는데, 앞으로 4년을 바라보면서 신임 경제팀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 짚어봤으면 합니다.
둘째, 경제정책 생산 구조에 대해서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이제까지는 경제 관료가 세월이 흘러도 예전에 썼던 정책을 그대로 꺼내서 다시 쓰는 구조였는데, 이 정책 생산 구조를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한국경제를 이끄는데 있어 어떤 경제철학이 필요한지 얘기를 해봤으면 합니다. 한국처럼 자원이 없고 인구도 1억이 넘지 않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분단국가에서 어떤 철학을 갖고 경제를 운용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윤증현 경제팀이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김종인 : 나는 기본적으로 상황 인식을 제대로 하느냐에 따라서 경제정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문제가 뭡니까?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자기들이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구호를, 경제상황이 엄청나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려고 해서 혼란이 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상황인식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국제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국제경제 상황을 너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그렇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금년 말이나 가야 회복기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하니까, 우리도 덩달아 우리 경제가 금년 상반기는 어렵다가 후반기에 가면 괜찮을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국제금융시장의 문제점이 어떤 식으로 노출될지 누구도 예측 못하고 있어요.
지금 영국의 국가부도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차 글로벌 금융위기'는 영국으로부터 온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세계 금융위기가 현재와 같이 해결이 안 된 상태로 가는데 올 하반기에 문제가 말끔히 해결돼서 실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금년에 마이너스 성장이 내년에 갑자기 플러스로 갈 것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년이 0% 정도 성장해서 금년 수준으로 이어지는 소위 L자형 성장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들을 전제해야 하는데, 우리는 안이하게 그저 올해만 어떻게 넘기면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금융허브, 5년전에 만들었으면…
또 현재 우리 금융이 안고 있는 문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별개입니다. 미국의 파생상품에 우리 금융기관이 뛰어 들어 발생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 김기환 서울파이낸스포럼 회장 등 저명하다는 경제전문가들이 10년 전부터 '금융만이 살길이다, 미국의 금융제도를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일본보다 역동성이 강하니까 금융허브가 될 수 있다'고 계속 주장해왔어요. 금융허브를 만들려면 금융기관들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면서 덩치 키우기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부실을 키워온 것 아닙니까. 만약 우리가 5-6년 전에 금융허브를 만들었으면 이번에 아이슬란드처럼 됐을 수 있습니다. 여건과 인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명심에만 사로잡혀 일을 추진하면 실패합니다.
얼마 전에 기획재정부 장관 인사 청문회를 보니까 장관 후보자가 "본인이 금융감독위원장일 때가 대한민국 금융의 황금시대였다"고 주장하더라구요. 그 '황금시대'가 오늘날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어요. 그때 우리가 남의 나라 흉내 내면서 금융감독을 허술히 하고 금융허브 한다고 외형경쟁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황금기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런 것들이 모두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어요. 과연 이들이 대한민국의 현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한 가지 바뀐 것은 강만수 경제팀은 금년 경제성장률을 3%로 잡고, 누구도 마이너스 경제성장은 얘기 못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새 기재부 장관이 -2% 성장을 예고했습니다. 그나마 정부가 숨 쉴 공간은 확보했다는 점은 다행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국내외 경제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선결과제입니다.
양극화 심화로 저소득층 이미 한계에 봉착
전성인 : 한국은 과거에 정말 운 좋게도 대외적 여건의 호전에 의해 경제위기를 해결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행을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김종인 : 한국경제가 1970년대부터 10년에 한번 꼴로 위기를 겪었는데, 그 때마다 국제여건이 호전되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죠. 하지만 이번엔 별로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국제여건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내년에 우리가 가장 빠른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환자가 중병이 걸렸는데 대강 이런 약을 쓰면 괜찮을 것이라고 순간적으로 모면하고 넘어가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김대중 정부가 99년도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선언했는데, 그때 대충 덮고 넘어간 문제가 지금까지 계속된 것 아닙니까. 이런 잘못을 또 겪으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어요. 쓸데없는 희망과 욕심을 버리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특히 현 위기 상황에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구분하기란 어렵습니다. 경제정책이 안고 가야 합니다. 지난 10년간 양극화가 계속 심화됐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의 경제에 대한 고통이 더 심화될 게 분명합니다. 아직까지 크게 확산 안 됐는데, 올 상반기 지나고 하반기에 가면 피부에 닿는 고통이 심각할 것입니다. 지금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규모를 놓고 정치권에서 옥신각신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경제위기 상황에서 저소득층에 대한 생계보장은 정부가 할 수밖에 없어요.
▲ 전성인 홍익대 교수 ⓒ프레시안 |
김종인 : 기재부 장관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경제가 역성장이 예상되니까 추가경정예산을 짜서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방향 자체는 맞다고 봅니다. 다만 추경 속에는 그 돈을 어디에 쓸지 사전에 반드시 계획이 제대로 서 있어야 합니다. 정부 재정이 필요한 부문에 시기적절하게 투입돼야 하는데, 지난해 짠 올해 정부 예산을 보면 4대강 살리기가 대표적인 경기부양책이었습니다. 이건 경제위기와 상관없이 자기들이 하려고 했던 사업입니다. 경기부양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전 세계가 바라는 게 10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소비시장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시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다른 나라가 다 어렵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각에서 내수를 증진시켜 수출을 보완하면 된다는 얘기를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무리입니다. 우리나라 시장이 인구 5000만도 안 되는 협소한 시장인데다, 지금은 양극화로 소득 편차가 매우 큰 상황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고소득층이 소비를 늘리기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저소득층은 한계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저소득층의 생계라도 보장해줘서 세계경제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견딜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제조업을 버리자고?
전성인 : 내수부양정책을 많이 운위하는데 핵심은 소비 진작입니다. 이는 미국이나 중국처럼 거대한 소비시장이 있을 경우 의미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도 소규모고 구조도 양극화된 상황이라 내수 진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의 내수부양은 진정한 의미의 소비수요 진작보다는 돈 넣고 반짝 경기가 좋아졌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건설경기 부양으로 간 것 같습니다.
주제를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앞에서 금융허브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이들은 금융을 현대적 의미의 서비스업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나라에서 제조업이 사실상 사양화됐고, 그러면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이냐, 금융 밖에 없지 않느냐, 금융이라도 잘하자, 이런 주장을 합니다.
또 최근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면서 제조업, 특히 중소기업의 상황이 어렵습니다. 전체 산업정책적 차원에서 제조업과 금융업의 균형을 어떻게 잡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김종인 : 우리가 제조업을 버려서는 못 삽니다. 금융업은 우리의 여건을 보면서 생각해야지요. 대한민국 같은 경제 규모에서 국제금융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산업을 금방 일으킬 수 없어요.
산업정책에 있어 경쟁력만 고려할 수는 없어요. 농업이 경쟁력이 없으니까 농업은 다 없애버리자, 1년에 3-4억 달러 들이면 쌀을 사먹을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세계경제에 이상이 생겨 교역이 중단되면 당장 식량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조업이 사양 산업이라지만, 이를 다 해체하고 금융업 등 서비스업만 갖고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영국의 사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영국이 제조업이 쇠잔하게 되면서 금융업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금융업이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았어요. 그런데 지금 갑자기 금융위기가 닥치니까 국가부도 우려가 제기될 정도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국가 권력과 비슷할 정도로 큰 힘을 가진 기업집단들이 있습니다. 국가 속에 국가가 존재하는 겁니다. 이런 대규모 기업집단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문제를 심도 있게 정책적으로 짚고 나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4800만 국민이 몇 개의 기업집단에만 의존해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될 것입니다. 이건 굉장히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지금이야 영원히 갈 거 같지만 개인 기업은 언젠가 무너질지 모릅니다. 미국의 씨티뱅크, GM,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이런 기업이 저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했나요.
역대 대통령 중 '기업 프렌들리' 아닌 대통령이 있었나
전성인 : 국가 속의 국가를 만드는 게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강조하셨는데, 현 정부는 경제위기를 핑계로 이런 재벌체제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라는 구호를 내걸고는 금산분리 완화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다 하면서 분주합니다. 이를 경제살리기로 포장하고 있기도 하고요.
김종인 :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기업 프렌들리를 얘기하는데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기업 프렌들리가 아닌 대통령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경제 때문에 기업 프렌들리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전반적인 기업의 활동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에 대해 원래는 시장친화적(market friendly)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과 개별 기업들의 상황을 봐주는 기업 프렌들리는 다른 얘기입니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은 경제구조를 왜곡된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이걸 막으려면 어느 정도 체제가 잡힐 때까지 규제가 필요합니다.
▲ ⓒ프레시안 |
김종인 : 기본적으로는 상호출자, 순환출자 때문에 구조 개혁이 안 됩니다. 다 엉켜 있어서요.
전성인 : 소유 지배구조 관련 주식을 팔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 금산법 파동을 보면 삼성이 명백하게 법을 위반한 것인데, 맨 마지막에는 특정 대기업이 망하면 어떻게 하냐, 기업 본부가 홍콩이나 미국으로 가면 어쩌냐, 이런 얘기가 나오고 결국 법을 삼성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주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규칙이 자꾸 왜곡됩니다.
김종인 : 정책을 다루는 관료들이 국가가 할 일과 개인 기업이 할 일을 식별 못 해서는 안 돼요. 1952년에 GM 사장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면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라고 말했고, 우리나라도 최근에 이와 유사하게 '삼성이 잘되면 나라가 잘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세계경제 위기가 개인들의 탐욕 때문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정 개인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나라 전체가 의존하는 구조를 가져가서는 안 되죠. 오늘날 GM에 상황에서 보는 것처럼 한 기업의 흥망성쇠에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특히 우리처럼 절제가 잘 안 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규제를 다 풀면 안 됩니다. 중소기업을 육성하자면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무한 자유 경쟁을 하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식의 무절제한 경제정책을 하는 나라가 정상적인 경제로 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둔한 일입니다.
큰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경제에 핑계 대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풀어주면 경제가 잘된다고 하고, 단편적인 관료들은 쉽게 규제를 풀어줍니다. 이런 걸 보면 미국에서 60년대말 닉슨이 집권하고 밀튼 프리드만의 시카고 학파가 잠시 득세할 때가 있었는데, 당시 폴 사무엘슨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사무엘슨이 '정치인들은 복잡한 얘기를 하면 들으려 하지 않고 프리드만처럼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식으로 단순한 얘기, 즉 구호에만을 솔깃해 한다고 비판했어요. 그런데 경제는 원래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 논리에 입각한 경제정책은 성공할 수가 없어요. 정부는 상황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각 나라 정부가 은행을 국유화하는 게 시장원리에 맞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국민을 안심시키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니까 냉정하게 판단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경제 관료는 전혀 상황 인식을 못하고 지금도 도그마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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