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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시대,갈 곳을 잃은 시대를 위한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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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시대,갈 곳을 잃은 시대를 위한 레퀴엠

[뷰포인트] 영화 <다우트> 리뷰

(*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우트>는 보수주의자인 수녀와 자유주의적인 신부의 대립을 다루며, 결국 수녀의 신부에 대한 축출로 결말을 맺는다. 영화의 초반, 알로이시스는 학생들에게 교칙과 처벌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가진 어두운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플린 신부는 학생들에게 다정하고 자애로우며 농담도 잘 하는 밝은 인물이다. 순진무구하고 젊은 제임스 수녀는 이들에 대해 갖게 될 관객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한다. 우리는 제임스 수녀처럼 플린 신부에 대해서는 호감을, 알로이시스 수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선입관으로 갖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야기는 무고한 신부를 음흉한 수녀가 쫓아낸 얘기에 불과한 걸까? 혹은 두 사람의 신분의 배경이 되는 '신앙'과 그들의 대립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의심에 대한 이야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알로이시스가 플린 신부를 추궁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나 결국 축출에 성공하는 것은 모두 '정황'만 가지고서다. 그녀는 아이의 음주를 목격했다는 정원사나 당사자인 아이에게 직접 사건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플린을 단죄한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플린의 해명과 반박은 알로이시스의 귓등에조차 도달하지 못 한다. 그런데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나면, 우리는 플린이 비밀을 안고 있다는 강한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알로이시스의 '공갈'에 직면한 플린이 그녀의 요구를 결국 순순히 받아들인 탓이다. 과연 이것은 그가 정말로 잘못을 저질러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에게 공개되기를 꺼리는 다른 비밀이 있어서일까? 혹은 이 일이 공론화되는 것이 밀러에게 위험하기에 자신이 물러나자는 '도덕적인 결단'에 의한 것일까?
▲ 모두에게 신망받는 플린 신부 역을 해낸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플린 신부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도적으로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를 학교에 받아들였고, 그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남달리 챙긴다. 두 사람이 과거 계속 대립해온 것으로 보이는 이상, 알로이시스 수녀가 인종차별적인 시선에서 밀러를 못마땅해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알로이시스 수녀가 밀러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장면은 딱히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밀러의 어머니를 대할 때의 태도 역시 그리 적대적이지 않다. 그런데 제임스 수녀가 플린 신부의 결백을 확신하는 것에도 또렷한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플린에게 죄가 있다는 알로이시스의 확신만큼이나 그의 결백에 대한 제임스 수녀의 확신도 평소 플린에 대한 호감과 개인적인 믿음에 기반해 있다. 그러나 만약 알로이시스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영화는 플린이 정말로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닌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 역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의심과 갈등을 그대로 경험하며 믿음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한다. 우리는 과연 알로이시스와 플린 중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의심에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의심'을 내세우고 있고,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미사장면에서 플린 신부의 강론 역시 '의심'을 주제로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정작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의심은 신앙이나 신념에 균열을 내기도 하지만, 그것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과정의 시험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순간, 불완전한 정보에 근거해 선택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나를, 혹은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 뒤에도 남는 의심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정치적 은유?

이 영화가 케네디가 암살당한 이듬해인 1964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가 격동하던 미국의 60년대의 변화를 '근심하며 경계하려는' 이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는' 이의 대립을 은유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으로 대변되는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그때, 자유주의적 진보의 상징이었던 케네디가 암살자의 총에 의해 쓰러진 사건은 진보의 굴절과 패배를 예고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케네디가 정말로 진보였냐는 별개의 얘기지만. 그런 상황에서 알로이시스와 플린의 대립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자유주의자)의 대립으로 보이기도 한다. 공익과 도덕을 위한다는 확고한 신념과 그에 대한 실천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도덕을 해치는 과정을 통해 발현이 됐을 때 과연 보수주의자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진보주의자가 자신의 실천에 치명적인 도덕적 스캔들이 붙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립 관계에서 알로이시스는 오히려 약자의 포지션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알로이시스가 보수적인 기득권의 전형적인 상징이라 보기도 어렵다는 데에 이 영화의 복잡한 성질이 드러난다.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에 의해 잠깐 묘사되는 바, 카톨릭의 위계질서 안에서 상대적인 기득권을 가진 것은 오히려 플린 신부쪽이다. 단적으로 플린은 알로이시스의 교장실에 들어와서도 손님 자리가 아니라 상석인 주인 자리에 앉으며, 알로이시스는 그런 플린을 불편해하고 경계한다. 한 교구 한 조직에서 일하는 데에도 이들의 식탁은 따로 차려지며, 알로이시스는 시력을 잃고 자리에서도 쫓길 처지에 놓인 노수녀를 책임지고 보살펴야 한다. 반면 플린을 포함한 '남자들'인 신부는 그들의 식탁에서 여성의 몸을 도마에 올리며 농담을 나눈다.

그렇기에 이 영화 속의 대립은 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과 닮은 면을 내비치기도 한다. '근거없는 모략'의 대명사가 된 '매카시즘'의 주인공,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소위 '빨갱이 사냥'을 일으키며 미국 전역을 레드 컴플렉스로 물들인 배경에는, 명문가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 출신에 엘리트 코스를 이수한 소위 '빨갱이' 고위 정치인들과 달리 그가 가난한 농부 출신의 카톨릭 아일랜드인이자 만학으로 로스쿨을 졸업한 '상대적 약자'라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던가. 즉, 그는 그가 공격했던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포지션에 있었고, 결국 그 때문에 공화당에 노동자 계층의 지지표를 몰아준 장본인이기도 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동과 신념에 한 치의 후회도 없었던 매카시나,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다는 알로이시스나 그리 달리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흘리는 눈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명배우들의 연기의 향연
▲ 단 한 씬에 10분간 출연해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바이올라 데이비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다우트>는 표면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거운' 영화다. 예쁘고 아름다운 스타들도, 화려한 특수효과도 없는 데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이 소박하고 단촐한 영화가 이토록 빛이 나는 것은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의 열연 때문이다. 이 영화에 출연한 네 명의 배우 모두 이번 아카데미상 남녀 주연/조연상에 후보로 올라 이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메릴 스트립이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야 이미 아카데미상으로 공인받은 연기파 배우들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무시무시한 대결은 그저 두 인물의 심적 갈등을 제대로 다루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얼마나 스펙타클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스크린에 스파크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새삼 확인해준다. 거기에 떠오르는 젊은 배우 에이미 아담스도 두 '어른'들의 대립에서 갈등하고 신념에 상처를 받는 여린 제임스 수녀를 제대로 표현해낸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단 한 씬에 등장해 약 10분간 영화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밀러 부인의 역을 맡은 바이올라 데이비스다. 그녀가 딱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알로이시스에게 모종의 비밀을 고백하는 순간이야말로, '연기가 빚어내는 반전'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다. 오래 전 <톰 행크스의 볼케이노> 한 편만 연출한 채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약해온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은 채 공인된 연극 원작에 충실한 채 자기 배우들의 연기를 무한한 신뢰를 담아 우직하게 스크린에 담음으로써, 도리어 걸작 영화 <다우트>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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