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선 정조가 노론 벽파(辟派)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299통이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심환지는 소설, 영화 등을 통해 정조를 독설한 배후로 지목된 적이 있어서 이 편지는 학계는 물론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정조 독살설'은 정조 사후 일부에서 제기돼 학계 일부에서도 그 가능성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등이 편지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이런 '정조 독살설'은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편지를 보면, 정조는 대립각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국정 운영, 주요 인사 문제 등을 일일이 상의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병세를 여러 차례 자세히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조 독살설이 흔들리자, 처음 정조 독살설을 대중적으로 제기했던 소설 <영원한 제국>을 쓴 이인화 씨는 "이번 자료 공개에도 불구하고 정조 독살설은 뒤엎을 수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편지가 독살설을 뒤엎을 결정적인 증거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정조 독살설을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미 지난 6월 정조 독살설을 정면 비판한 한 한의학자의 주장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 교수)은 <주간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이인화 씨 등이 사망자의 구체적 질병은 외면한 채 시대 상황, 권력 관계만 놓고 추리로 일관하고 있다"며 "정조는 의료 사고로 죽었다"고 주장했다.
"정조의 죽음은 인삼 오용으로 인한 의료 사고"
이상곤 원장은 당시 기고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세밀하게 왕의 약물 처방 및 투약 뒤의 증상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며 정조 실록을 토대로 그의 사망 원인이 "인삼 오용으로 인한 의료 사고"라고 주장했다.
이상곤 원장은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명이 종기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며 "재위 24년 6월부터 정조의 종기 치료에 관한 기록은 여러 차례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종기로 여러 차례 고생하던 정조는 숨지기 이틀 전인 1800년 6월 26일 인삼, 꿀 등이 들어간 경옥고를 복용한다.
이상곤 원장은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정조는 체질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약제를 싫어했다"며 "대표적인 것이 인삼이 들어간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조는 6월 24일 어의가 권하는 경옥고 처방을 "나는 원래 온제를 복용하지 못한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이 원장은 "경옥고에 이어서 또 다시 인삼이 들어간 약제를 복용하면서 정조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며 "인삼은 적절히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맞지 않는 사람에겐 오히려 독이 된다"고 이 시점에서 정조가 잘못된 처방을 받았음을 강조했다. 이 원장은 "인삼은 몸이 찬 사람에게나 먹였을 때 효험이 있는 것이지, 열이 많은 사람에게는 독약"이라고 설명했다.
"정조 수은 독살설은 근거 없어…소량의 수은은 약이 될 수도"
이상곤 원장은 이어서 많은 이들이 정조 독살설의 근거로 삼는 심환지의 친척 심연의 처방을 놓고도 정반대 해석을 내린다. 이 원장은 "심연이 처방한 연훈방을 사용한 뒤인 6월 25일 정조의 증상은 한결 나아졌다"며 "정조는 연훈방을 26일 재차 사용했고 종기 부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의혹 제기는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상곤 원장은 이어서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연훈방의 수은 성분을 거론하나) 이것은 서양 의학의 눈으로만 판단하는 것"이라며 "수은은 차갑고 열을 식히는 데는 으뜸"이라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연훈방을 장기간 복용하면 수은 중독 위험이 있겠지만, 사흘 정도 사용한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상곤 원장은 마지막으로 "진실은 자신의 시각이 아닌 사실로 바르게 평가돼야 한다"며 "정조는 <향약집성방>에서 <동의보감>에 이르기까지 인삼을 위주로 허를 보하는 처방을 장려하던 의학 정책에 눈이 멀었던 한국 한의학이 만들어낸 의료 사고의 희생양"이라고 정조 독살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이런 이상곤 원장의 지적은 이번에 공개된 편지에서 정조 스스로 자신의 병세를 설명한 대목과도 맞아떨어져 더욱더 신빙성이 커졌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죽기 13일 전인 6월 15일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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