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경제론'이라는 틀로 한국의 20대 문제를 처음으로 조망해 책 제목 자체가 개념어로 굳어진 <88만원 세대>를 둘러싼 논란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젊은 보수논객을 자처하는 변희재 씨가 '실크세대론'을 주창하면서 끼어들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다. 공저자인 박권일 씨는 <88만원 세대>가 세대내 '계급'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 했다는 일종의 자기 비판을 하면서 함께 책을 쓴 우석훈 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변희재 씨의 글은 논외로 치더라도, 박권일 씨가 제기한 '세대론'과 '계급론'의 문제는 진보진영 내에서 충분히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논란과 관련해 20대 논객 중 한 명인 한윤형(yhhan.tistory.com) 씨가 기고를 보내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
1. 왜 세대론과 계급론은 대립하지 않는가?
얼마 전 변희재 실크로드 CEO 포럼 회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장문의 글 "실크세대론과 88만원 세대론의 소통을 위하여" (<조선일보> 2009년 1월 27일)는 많은 파장을 낳았다. 그것이 일전에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이 변희재에게 건넨 '덕담'(<한겨레> 2009년 1월 15일)에 대한 반응이란 점에서 더 그랬다. 역시 <88만원 세대>의 공저자인 자유기고가 박권일은 레디앙 기고문(<레디앙> 2009년 1월 30일)에서 우석훈이 조선일보의 독우물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우석훈이 변희재를 상대해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가 가열찬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박권일의 글은 88만원 세대 담론을 그릇되게 활용하는 어떤 조류에 대한 탁월한 지적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의 말이 수용되는 방식이다. 변희재는 재차 조선일보에 쓴 "88만원세대론은 계급투쟁용이라 고백한 공저자 박권일" (<조선일보> 2009년 2월 7일)이란 글을 통해 '드디어 그들은 세대론이 계급론이라는 사실을 실토했다. 386세대의 계급투쟁의 방식이다. 타도하라!!'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부 좌파들은 "세대론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계급론만이 킹왕짱이라는 사실을 저자 스스로 인정했다. 세대론은 파탄났다. 계급!!! 계급!!!! 계급!!!!!"을 부르짖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평소의 논의의 정합성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내가 폄하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 놓고 생각해보면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고민해보지 않은 분들이 아닌가 싶다. 박권일의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을 '계급'이란 단어 하나로 에스컬레이션시켜 '이념 투쟁'을 하자고 덤비는 꼴을 보니 말이다.
▲ <88만원 세대> 책 표지. ⓒ프레시안 |
<88만원 세대>에 이런 현상에 대한 지적이 비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쉽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부모와 한 팀이 되어 용돈을 받으며 자발적으로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로 뛰어드는 사실을 지적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을 가장 불쌍한 이들로만 묘사한 것도 아쉽다. 하지만 한권의 책이 모든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88만원 세대>는 편하게 자라났지만 열정도 없고 부모 재산을 축내며 게으름을 피워 대한민국을 망칠 천형을 타고 났다고 지금껏 묘사되었던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처해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만으로도 크나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좌파들은 이런 문제들을 '세대론'이라 부르면 안 된다고 말한다. 무조건 계급문제라는 것이다. 진보좌파들이 말하는 모든 논의는 무조건 계급투쟁하자는 얘기라는 변희재 류의 독법과 어쩌면 이리 판박이인지. 뭐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계급론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일까. 그럼 학벌문제라는 말도 쓰지 말고 계급론이라 부르고, 비정규직 문제라는 말도 쓰지 말고 계급문제라고 부르며,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 문제도 계급문제라고 부르거나 자본가들 내부의 문제니까 신경쓰지 말기로 하자, 뭐 이런 얘긴가? 천하에 한심한 족속들이다.
당신들 말이 맞다. 변희재가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이유도 계급적이고, 우리 동네 어떤 할머니가 상습적으로 쓰레기를 투기하는 이유도 계급적이고, 바바리맨이 여고 앞에서 바바리를 벗어 제끼는 이유도 계급적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좌파 바바리맨들이 바바리를 벗어 제끼고 제 거시기가 붉다는 것을 자랑하는 습속도 계급적인 것으로 보인다. 안 그런가?
나는 <88만원 세대>에서 두드러진 세대론적 접근의 함의는, 계층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지금까지 내가 이긴다고 믿고 있었던 사회의 평균적인 인간들이 패배할 거라는 사실을 폭로한'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게 잔인한 사회다. 그 약자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한국의 중간계급들은 하위 30%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다투어 빚을 내면서까지 제 자식을 대학에 보내 85%라는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률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88만원 세대'는 당신들 자녀의 95%가 패배자가 될 거라고 말한다. "약자는 죽어도 돼. 그래야 사회가 더 발전하거든."이라고 말하던 이들에게, "당신네 자식이 바로 그 죽어가는 약자가 될 거요."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더 밀어주고 사회적 약자를 철저하게 외면하던 대한민국식 게임의 룰이 파탄나는 현장을 <88만원 세대>는 조망하고 있다. 따라서 '88만원 세대'의 문제접근은 지금껏 대한민국이란 사회가 작동하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다른 고도화된 자본주의 공업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대 간 불균형 현상을 겪으면서, 또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방치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모조리 얻어맞게 된 것이다. 지금껏 방치했던 문제들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형국이라 하겠다. 그러니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오늘날의 20대들의 처지를 반추하면서 이 사회의 문제를 추려내야 하고, 그 추려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론과 계급론은 대립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고 그 소홀히 취급된 문제들을 언급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이 '88만원 세대론'을 건전한 담론으로 만들 것이라는 박권일의 판단은 영원히 진실이다. 문제는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 세대론의 주창자 우석훈이 현재 취하고 있는 정치적인 스탠스이다.
2. 우석훈의 '세대론적 환원'의 문제에 대해
언어에는 묘한 마력이 있다. 사람은 제 생각을 담을 도구로 하나의 말을 선택하겠지만, 그 말을 계속 쓰다보면 그의 생각자체가 말에 얽매이게 된다. <88만원 세대>를 집필할 때 박권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입장이었을 우석훈이 일종의 '세대론적 환원'을 감행하게 된 건 '88만원 세대' 담론의 창시자로서 그 말을 자꾸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그가 일종의 말의 덫에 걸려들게 된 것일 거라고 좋게 해석해 주고 싶다. 말하자면 건전한 책임윤리가 가져온 역작용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우석훈이 변희재를 상대해 준 것 자체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변희재를 의미있는 존재로 파악하게 된 까닭이 그의 평소 지론에 맞닿아 있다면, 나는 그 지론을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지론은 사실에 어긋나고 전략적으로도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 지론에 대해 내가 붙인 이름이 바로 '세대론적 환원'이다.
글 첫부분에 간략하게 설명했던 세대론과 계급론의 한국적인 중첩에 대해 이해한다면, 우리는 '20대들이 문제이긴 하되, 20대만이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대안이란 것도 그 사실을 이해하는 틀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우석훈은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 마치 '20대들만을 위하는'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인양 굴었다. 변희재의 준동 이후에야 그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우석훈이 그 지점에서 이미 세대론을 잘못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에 줄기차게 밀었던 두 개의 정책적인 대안이 '20대 국회의원'론과 '20대 아파트'론이다. 20대 국회의원론의 경우 그가 2008년 총선 정국에서 직접 경향신문에서 언급 (<경향신문> 2008년 3월 6일)하기도 했고,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이 경향신문 블로그인 지면을 통해 소개(<경향신문> 2008년 3월 13일)되기도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하지만 20대 아파트론의 경우 공식적인 지면에서 논의 된 일이 없고 우석훈의 '세대론적 환원'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얘기를 해보아야겠다.
모두 알다시피 <88만원 세대>는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주거권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그 접근방식에 대해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우석훈이 20대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대 아파트'란 것을 지어서 공급하자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우석훈은 프랑스에서 나온 정책이란 이유로 이것의 합당함을 강변한 것으로 안다. 동의할 수 없다. 프랑스와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첫째, 프랑스에서 아파트는 빈민층이 사는 주거공간이지만, 한국의 경우 아파트는 모든 이들의 욕망의 대상이다. 한국 실정에 맞추려면 차라리 지금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염가의 고시원을 공급해주겠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일일 텐데, 부모님의 집에 기거하는 대다수의 20대들은 그런 식의 '독립'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님 집에서 비비는 것이 훨씬 더 높은 생활의 질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 고시원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으니, 정말로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면 고시원 크기를 늘려달라고 시위하자고 주장하는 쪽이 더 나은 일이겠다.
둘째, 많은 경우 한국에서 가장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20대라고 볼 수 없다. 가령 막 아이를 낳은 30대 신혼부부를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이야말로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만약에 20대 아파트라는 것이 실제로 건설되어, 이들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독립하기도 싫어하는 일군의 20대들에게 집에서 나오라는 메시지만 던지게 된다면, 이보다 코미디 같은 일이 어디 있으랴.
이런 문제제기는 '88만원 세대' 담론의 현실적인 조건을 챙기자는 것이다. 20대 아파트론이 택도 없는 소리가 되는 이유는 1) 한국 사회에 20대가 아닌 사회적인 약자들이 넘쳐난다는 경제적인 현실과, 2) 20대들의 권리박탈이 그들 부모와의 유대 아래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화적인 현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발성이 환경에 의해 강요된 자발성이라는 지적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번에 그런 환경적 조건과 그것을 통해 형성된 문화적 조건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우석훈의 영향으로 '20대 아파트'론을 말하는 희망청 상근자들에게 왜 이 정책이 말도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해 나름대로 열변을 토한 바가 있다. 내 말에 그들이 동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나도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88만원 세대론의 정립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한 셈이다.
나는 원래 우석훈의 그와 같은 실책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천명한 '20대 국회의원'론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 공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했고, (나는 우석훈의 말을 좇아 '20대 비례대표론'을 주장한 진보신당 학생당원들과도 논쟁을 했다.) 그가 블로그에서 얘기하고 희망청 상근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20대 아파트'론에 대해서는 희망청 상근자들을 향해 문제점을 제기한바 있으니 다른 비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석훈이 변희재 류의 창업운동을 '세대론에 대한 우파적 대응'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대론적 환원'에 대한 비판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변희재의 활동은 어떤 측면에서 보든 세대론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하로는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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