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인질링 |
사실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장르영화용으로도 매우 흥미진진한 아이템이 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누아르 장르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미 만들어진 지금의 영화에 스릴러나 누아르의 특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의 행방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은 스릴러의 공식을 적절히 활용하며, 경찰의 부패 실상을 그리는 인서트 씬이나 존스 반장과 경찰청장이 사무실에서 만나는 씬 등은 전형적인 누아르의 화면을 선보인다. 즉, 빛을 최소화하고 강렬한 명암대비를 강조하는 것이다. 거기에 이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20대 말에서 1930대 중반의 미국이란, 1차 세계대전 이후 번영과 풍요를 자랑했던 이른바 '재즈의 시대'이자 금주법의 시대가 막 종언을 고하고 대공황이 발생한 시기이다. 유수의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묘사하던 바로 그 시대인 데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누아르 영화들이 즐겨 그리던 '경찰의 부패'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 영화를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한숨에는 그런 '기막힌' 요소들이 속절없이 '낭비돼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가장 우직하고도 심심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가 전적으로 옳았다고 처음부터 전제하면서, 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시스템에 맞서 싸우게 되는 한 인간의 휴먼 드라마로 만들었다.
물론 위대한 모성을 투쟁을 그린 영화는 흔하며, 힘없고 나약하며 무지한 한 개인이 시스템 전체와 맞서 싸우는 전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도 100년이 넘는 영화사에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려있다. 그런데 이스트우드 감독이 강조하는 모성은 남자 예술가들이 즐겨 묘사하는 전형적인 '위대한 모성 신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영화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운 길도 걷는 '엄마'보다는, 자신의 실존을 걸고 투쟁하는 '인간'이 모습에 집중한다. 모성은 말하자면 거대한 맥거핀으로, 그 투쟁에 강력한 동기와 추동력이 되었을 뿐이다. 대신 이스트우드 감독이 집중하는 것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하며 진취성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시대적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 여성, 그 여성이 '착한 남자들'의 적극적인 도움 하에 온 힘을 다해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다.
시대가 타락하고 공권력이 부패하면 그 사회의 가장 약자들이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는 법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눈에, 부패가 극에 달했던 저 시대는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데도 공권력이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아이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시대이자, 여성이 자신의 주장 한 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경찰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기는커녕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다가 급기야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쳐넣는다. 그녀를 돕는 착한 남자들 역시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녀의 말과 믿음을 그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과 슬픔으로 인한 현실 회피로만 치부해 버린다. 그들이 그렇게 여길 여지가 충분했다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주변인으로 소외시킨다. 존스 반장을 증언대에 올린 재판 장면이 단적인 예이다. 변호사는 유난히 독하고 센 어조로 그녀의 아들이 죽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한다. 이 순간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크리스틴의 묘한 표정을 여러 번 인서트 씬으로 교차시킨다.
▲ 체인질링 |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시대 그렇게 숨을 죽인 채 자신의 말조차 남자들의 입과 권위를 빌어야 했던, 그 와중에 자신의 의지가 다시 한번 굴절되어야 했던 여자들의 그간의 고통에 대한 다독거림으로 읽힌다. 브리그랩 목사(존 말코비치)나 변호사, 혹은 이들을 돕는 제3의 사설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도 장르영화적으로도 훨씬 흥미진진한 영화가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녀를 돕는 이들 역시 조력자이자 조연의 위치로 한정시킨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그 자신이 브리그랩 역을 맡지 않은 것도, 영화적 기법이나 테크닉의 면에서 담백한 절제미를 유지한 것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온전히 크리스틴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쇄살인을 다루는 영화 속 또다른 기둥의 씬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것에서 이런 추측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연쇄살인 회고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며, 우연히 그 사건을 맡은 형사는 존스 반장과 달리 어린아이의 증언에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사건의 본질에 도달한다.)
그렇게 그 시대가 외면했던 한 여인의 진실을, 이스트우드 감독은 오롯이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이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냄으로써 대신 사죄를 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는,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옮기고 있는 자신 역시 남자 감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겸손함과, 그렇기에 행여 그녀의 목소리가 또 다시 왜곡될까 두려워하는 신중함이 함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진정한 걸작인 이유도, 이스트우드 감독이 진정한 거장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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