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그 깊이와 폭을 쉽게 예측하지 못한다는 경제위기가 시작됐다. 10년 전 공포의 기억으로 모두가 떨고 있다. 두려운 것은 사실 모두지만, 벌써부터 경제위기를 몸으로 실감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도 그 규모를 제대로 집계조차 하지 못하지만 비정규직은 이미 속속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다. 그나마 비정규직노조라도 있는 곳은 낫지만, 그곳에서마저도 그들의 고용을 지키기가 녹록치 않다. 저 멀리 청와대에서는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고, 바로 옆 일터에서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금속노조 박점규 미조직사업부장이 <프레시안>에 3편의 글을 잇따라 연재한다. <편집자> |
경제 위기 한파가 몰아치면서 노동자들이 해고의 불안에 떨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불안을 넘어 공포다. 중소기업만이 아니다. 국내 2위 재벌기업인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도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5시 30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500여 명이 민주광장에 모였다. 버스와 트럭을 만드는 10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 중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날 전주공장에는 현대자동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2500명이 모였다. 전주공장이 만들어진 이래 가장 큰 집회였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 해 노사가 합의한 2009년 1월 '주간연속2교대제 전주공장 시범 실시'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였다. 주간2교대는 심야노동을 없애고 주야 8시간씩 일하자는 것이다.
회사는 경제 위기를 이유로 주간2교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버스부에서 야간근무를 없애 상시 주간근무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야간근무 안하면 좋은 거 아닐까? 월급이 깎이지 않는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야간에 일하던 정규직 노동자가 주간으로 전환되면 비정규직 노동자 550여 명이 일자리가 사라진다. 이날 집회에 초대받지 않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 500 여명이 정규직과 연대하러 간 이유다.
정규직과 연대하러 간 비정규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라지고 있다. 정규직 월급의 절반만 받으면서도 묵묵히 일해 왔던 이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공장에서 쫓겨나고 있다. 지난해 10월 쌍용자동차 노사는 정규직 전환배치로 비정규직 노동자 300명이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공장에서 사라졌다.
지난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는 에쿠스 단종으로 115명의 비정규직이 해고됐다. 지금도 한 업체에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지난 7일 아산공장 출고센터의 비정규직 노동자 중 17명이 희망퇴직 등으로 일터에서 쫓겨났고, GM대우차에서도 1월 29명이 부평공장을 떠났다.
현대차 아산공장에서는 12월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만 강제퇴근, 강제휴업을 실시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단결과 연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기아차를 제외하면 자동차3사에서 비정규직 우선해고와 희생 강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현대차 전주공장에 이어 GM대우차에서도 중형차 라인인 2공장에서 주야 맞교대를 상시 주간근무로 전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소문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주간으로 바뀌는 노동자 숫자만큼 비정규직이 해고된다는 의미다. 아산공장, 울산2공장 등에서도 소문은 계속 떠돌고 있다.
삼성, LG에 비정규직 몇 명?
비정규직 우선해고 현황에 대한 파악은 금속노조에 가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는 사업장에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2~4배에 이르는 조선소, 100% 안팎의 철강회사 등에서는 비정규직이 언제 어떻게 잘려나가고 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투쟁력이 강하다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업장이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노총 소속이나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는 어떨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지난 봄 창원노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STX중공업에 사내하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얼마인지 물었더니 담당관은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확인 결과 STX중공업은 26개 사내하청업체 1840명의 하청노동자가 선박엔진을 만드는 비정규직공장이었다.
삼성전자에 몇 개의 사내하청 업체와 몇 명의 비정규직이 있을까? LG전자와 SK텔레콤에 몇 명의 비정규직이 일하고 있고, 몇 명이 해고되고 있을까?
금속노조 GM대우비정규직지회는 "1월 들어 2개 업체에서 29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해고됐다"고 주장했지만 GM대우차에서는 "비정규직 고용 문제는 하청업체가 맡고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정규직과 같이 자동차를 만드는데 자기네 직원이 아니라 모른다는 것이다.
삼성, LG, SK, 포스코 같은 재벌들도 똑같이 말할 것이다. 자기네 직원이 아니라 모른다고. 사용자들은 그렇다 치고, 적어도 노동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하루 비정규직이 얼마나 짤렸을까?
비정규직 없는 모범적인 사업장
▲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현대차 전주공장에 이어 GM대우차에서도 중형차 라인인 2공장에서 주야 맞교대를 상시 주간근무로 전환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소문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주간으로 바뀌는 노동자 숫자만큼 비정규직이 해고된다는 의미다. ⓒ프레시안 |
김치냉장고 딤채를 만드는 위니아만도를 비롯해 발레오만도, 동원금속, 상신브레이크, 한국게이츠, 비엔테크, 한국TRW, 유성기업, 발레오공조, 대원강업, 대한칼소닉, 동양물산, 세신버팔로, 케피코, 두원정공, 우창정기, 대한이연, KEC, 대우라이프 등이다.
경비와 식당, 청소 등에 소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는 사업장에서도 금속노조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에 따라 올 1월 1일부터 금속산업최저임금인 월 95만원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상시적인 생산 공정에는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을 채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이 IMF 구제금융사태의 경제위기를 이용해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라인에 대거 투입했고, 노동조합이 이를 막아내지 못해 비정규직이 대량 양산됐다.
현대자동차는 정규직 조합원 4만5천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현대모비스를 포함해 1만9000명(43%)에 이른다. GM대우자동차는 1만 명에 4900명(49%)이다. 기아자동차는 2만8000명에 3800명(14%)으로 비교적 적은 편이다. 쌍용차는 다 잘라내고, 이제 350명 남았다.
철강업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규모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현대제철 당진공장은 정규직 조합원 884명에 사내하청 노동자가 700여 명이고 인천, 포항공장, 현대하이스코 등도 비슷하다. 조선소는 한진중공업 정규직 1500명에 비정규직 4000명, 현대삼호중공업 정규직 2000명에 사내하청 8000~9000명, STX조선 정규직 1000명에 비정규직 4000명이다.
정규직 0명 공장을 조사하라
기아자동차 모닝을 만드는 서산의 동희오토가 '정규직 0명 공장'이라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우버스 울산공장, 현대중공업 군산공장, STX중공업, 도루코 문막공장, KM&I 군산공장 등 비정규직 공장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노동부는 정규직을 단 한 명도 고용하지 않는 야만적인 공장에 대해 어떤 조사나 특별근로감독 등을 실시하지 않고 있다. 아니, '정규직 0명 공장'이 전국에 몇 개인지, 몇 개의 하청업체 몇 명이 고용되어 있는지 어떤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삼성, 현대기아차그룹, LG 등 재벌들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 몇 명인지, 경제위기를 이유로 비정규직을 몇 명 해고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노동부는 지금 당장 재벌들의 비정규직 규모와 해고 현황을 조사하고, '정규직 0명 공장'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않고 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모범적인 사업장,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회사에 대해 세금혜택과 정규직 전환 기금 등 다양한 지원을 해야 한다.
정부는 경제위기를 이용한 비정규직 대량학살에 대해 지금 당장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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