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신이 지쳐있을 때마다 집 안에 틀어박혀 부담 없는 책이나 읽으면서 세상에서 도망치곤 한다. 그러나 '부담 없는 책'을 고르는 일도 만만찮은 일이다. 내가 원하는 '부담 없는 책'이란 휴가용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년의 눈물>은 이런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었다. 사적 에세이면서도 사회적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12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도 한참이 돼서도, 여전히, 이 책의 이야기가 머리를 맴, 돌, 고, 있었다. 무언가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이야기, 듣지 못한 목소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시 이 책을 찬찬히 곱씹기 시작했다.
'계몽된 독자'
▲ <소년의 눈물: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돌베개 펴냄) ⓒ프레시안 |
그러나 이런 나의 오만이 바로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한국 독자들의 몰이해의 정체였다. 이른바 '계몽된 독자'의 태도로는 재일조선인들이 지닌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의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짐짓 자신은 아이의 눈물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공정한' 어른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소년의 눈물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E. 케스트너의 말을 인용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타자로서의 어린 아이의 존재론적 무게에 대한 각성이다. 어른들은 아이의 눈물은 단지 아이의 눈물일 뿐이라고만 생각한다. 아이의 눈물에 깃든 슬픔의 무게라는 것이 자신의 그것보다 무거울 리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눈물에 담긴 슬픔은 어른의 것만큼 무겁다. 아이를 눈물짓게 하는 문제는 아이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과 얽힌 삶의 관계 문제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의 눈물을 그저 아이들만의 사소한 문제로만 보고 그들의 상처에 공감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의 '투정'을 달래기에만 급급해 한다.
타자로서 존재하는 자들의 처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타자로서 재일조선인의 삶은 무정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상처 받고 눈물짓는 어린 아이의 삶과 같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서는 그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타자가 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자신들의 뒤틀린 모습을 폭로하는 거북살스러운 '어린아이'와의 만남에서 그들은 언제나 눈살을 찌푸리며 도망을 가곤 할 뿐이다.
"I am a Japanese"
일본인의 이러한 모습은 저자의 중학교 영어 선생의 기억에서 재생된다. "I am a Japanese(나는 일본인이다)"라는 문장을 읽지 않고, 자신은 조선인이라고 우물거렸던 제자의 마음을 일본인 선생은 외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쓸데없는 것을 말한다고 불쾌해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그 사회의 가치를 익힘으로써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학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일본 주류 사회의 타자에 대한 냉대와 무관심을 알게 된 소년은 어느새 학교에 가지 않고 꾀병을 부려 책과 함께 다락방으로 숨거나, 진짜 일본인 부모가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주류 사회로부터의 소외감과 그곳에 대한 동경이라는 상반된 의식은 명문교에 진학하여 고상한 일본 중산층이 되기를 바라는 꿈으로 이어지다가도, 이내 자책감에 빠져 버린다. 그 꿈이 출신 계급과 민족에 대한 배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년 서경식의 의식 속에는 태어난 곳에 편입되어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조선인의 자긍 간의 첨예한 충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양자택일만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소년은 교양인이라는 출구를 찾는다. 세속적 성공과 민족적 현실 모두에서 자유로운 보편적 교양인으로 행세할 수 있다면, 성공을 위해 민족을 버렸다는 자책에도 떳떳하고, 교양 있는 조선인이 되어 민족의 자긍을 드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소년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서와 교양이라는 보편의 세계에서도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없다. 보편의 이름으로 치장된 교양의 열망이 단지 교양 일본인이라는 또 다른 폐쇄된 주류 사회로의 편입에 대한 욕망에 지나지 않음을, 그리고 이 열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서 입은 소년의 상처는 조국의 품에서는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핍박받은 민족의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몰이해가 체계화된 일본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쉽게 비판한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몰이해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조국이라는 어른
서경식 씨는 1966년 처음으로 고국인 대한민국에 방문한다. 고국에서 그가 느낀 것은 따뜻한 위로보다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자신의 처지였다. 자신의 성을 '서'가 아닌 '소'로 발음하여 고국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 경험에서 그는 자신이 동경한 언어가 자신의 삶에서는 이미 폐멸된 언어임을 절감한다. 자신의 모국은 대한민국 또는 조선이지만, 그의 모어는 일본어다. 자신의 지향을 거부하는 언어를 매개로 자신의 지향을 찾을 수밖에 없는 자의 역설과 슬픔. 소년 경식의 이 눈물은 고국에서도 이해받을 수 없었다. 그저 우리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신 분치고는, 한국어가 아주 능숙하신데요"라고 대견해 하거나, 한민족에 대한 일본의 차별적 행동에 분개할 뿐이다. 고국은 그에게 또 다른 무정한 어른이었다. 어른인 우리는 그를 재일조선인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일본에 살면서 곤란을 겪고 있는 한국인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너나 나나 같은 한민족'이라는 의식은 그들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는 태도로 작용할 수 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지위를 단순히 개념적으로 인식할 뿐이다. 거기에는 그들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발자국을 느껴보려는 마음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고난에 대해 재일조선인의 심정으로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한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에게 우리의 이러한 위로는 아이의 심정에 공명하지 않고 단지 달래기만 하려는, 선량하나 무정한 어른의 위로로만 보일 것이다.
자기중심적 형식화에서 비롯하는 표상
재일조선인이 아닌 이상, 문자 그대로 그들의 심정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심정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그대로 경험해 보라는 요구가 아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인식 태도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재일조선인을 민족이라는 추상적 공통성에 기대어 체제의 틀 속에서 그들을 표상하고 있다. 민단과 조총련이라는 틀에 담긴 재일조선인의 표상은 우리의 의식에 자리한 자기중심주의적 사고의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자기중심적 사고는 추상적으로 개념화한 틀 속에 모든 것을 공정하게 파악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자기 중심적 추상화 과정은 자기 주체 외부에서 발견되는 것들, 즉 타자의 구체성을 추상적 개념틀에 걸맞게 형식화시켜, 그것이 지닌 풍부한 질감을 털어낸다.
다행히 이 추상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타자의 처지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할 수 있다. 그것의 현재적 모습이 입헌민주주의적 틀이다. 입헌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타자는 입헌민주주의 헌법의 구성원으로서 모두와 단지 동일하게 대우받을 뿐이다. 그들의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은 이 획일적 평등화 작업에서 무시당한다. 재일조선인도 일본 헌법이 보장하는 동등한 시민 구성원으로 대우받는다. 얼핏 보기에는 이것이 성공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타자가 흘리는 슬픔의 눈물을 닦아 주기에는 한계가 많다. 그들이 지금 겪는 슬픔은 오히려 여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공명하기 위한 준비
미국의 일본문학자 노마 필드는 타자라는 말에서 항상 멈칫한다고 말한다. 타자라는 말을 윤리적으로 구사하는 자신은 타자를 소외시키는 구조와 무관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자의 삶 속에 내재한 아픔을 상상하는 능력이 부족한 자유주의의 보편적 윤리관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지닌 보편주의적 윤리관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차원을 과소평가하거나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간주한다. 자유주의적 윤리관은 모든 것을 주체중심적 형식화라는 사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에서 보자면, 타자는 주관 안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그것의 존재와 의미는 주체의 개념적 형식화 작업에서 파악된다. 따라서 형식보편주의의 갈등 해소법은 동등한 추상적 존재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형식적 절차를 마련해 그에 따른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사회 통합의 윤리적 모델이다.
자유주의자의 말대로라면 재일조선인을 비롯한 타자의 슬픔에 대해서 우리는 파악할 길이 없다. 잘 와 닿지도 않는다. 타자가 우리에게 주는 경험이라고는 당혹스럽고 괴이하며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개념적 형식화로는 헤아릴 수 없는 타자와 관계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린 결코 그들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들과 함께 엮여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상상해보려는 상호주관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말은 그냥 모르겠다가 아니다. '아무리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보고 그 마음을 상상해봐도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자각에서 우리는 1인칭 복수적 관점에서 벗어나 상호주관적 관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면해야 한다. 비록 타자를 끝내 알 수 없더라도 이 '알 수 없음'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알 수 없는 타자의 아픔을 상상해봄으로써 우리는 그들과 보다 많고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와중에서 얻게 되는 의혹과 회의들은 단순한 의혹들이 아니라 고양된 의문으로 작용할 것이며, 이것은 또한 타자의 편에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형식보편적 윤리원칙의 안정을 서둘러 신뢰하기 보다는, 고양된 혼란을 회피하지 않는 관계 맺음 속에서 더 강한 사회적 연대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이 소년에게
타자의 고통을 헤아려 보고, 그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우리를 무정한 어른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타자들이 우리와 못지않은 눈물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상상하게 되고, 그것의 의미를 체험하려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폐쇄된 자아, 외로운 주체가 아니라 열린이들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무정한 어른이 지양된, 부정의 부정-그러나 헤겔적 의미로서의 부정의 부정이 아닌-으로서의 소년은 슬픈 눈물은 흘릴지언정 외롭지 않을 것이다. <소년의 눈물>은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준 책이며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를 준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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