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부터 4년이 지난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힘입어 2007년 대선에 이어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많은 국민과 민주당 및 민주노동당이 1% 강부자를 위한 감세라고 비판하고 있는 감세안에서부터 금산분리 완화와 총액출자 제한제 폐지, 집시법 개악, 휴대전화 감청 허용, 국정원 직무범위 확대, 사이버 모욕죄 신설, 신문·방송 겸업 허용,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등을 추진하고 있다. 공수가 뒤바뀌었을 뿐 4년 전의 모습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를 놓고 보자면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다르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호기 좋게 시작한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개혁입법은 예산안을 볼모로 한 한나라당의 저항에 좌초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전략 부재가 문제였다.
올해의 경우 전혀 상황이 다르다. "(…) 민주당은 하루는 대안 야당이라는 이름하의 어정쩡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한나라당의 감세안에 또 다른 감세안으로 대응하는 멍청함을 보이다가, 다음 날은 강경노선으로 선회해 재야 세력과 연대해 반MB연합전선에 나서는 등 갈팡질팡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 감세안을 하나도 막지 못했다. (…) 민주당이 능력도, 투지도 없기 때문이다. 여당 시절에는 다수의석을 가지고도 개혁법안을 관찰시키지 못하는 무능을 보이더니, 야당이 돼서도 여당의 독주를 막지 못하는 무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허긴 없었던 능력이 갑자기 생기겠는가?
무능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투지마저 없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여당으로 '등 뜨시게' 지내더니 민주화 운동과 야당 시절의 투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4년 전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기 위해 배수진을 치고 전면전을 벌이고, 사립학교법 개혁을 막기 위해 치열한 거리투쟁을 벌였던 한나라당의 절반만 따라가도 지금 같은 결과는 막을 수 있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속도전을 표방하며 전격처리를 시도하고 있는 MB법안에 대해 뒤늦게 결사투쟁에 나섰다. 그 같은 투쟁이 성과를 거두고 '역시 민주당은 무능하다'는 소리를 더 이상 듣기 않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에서 배워야 한다."
지난 12월 23일 한국일보에 썼던 "역시 무능한 민주당"이라는 칼럼의 내용이다. 이후 전개된 MB악법저지투쟁에서 민주당이 오랜만에 유능과 투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국회 본회의장의 기습점거라는 전략적 유능함이 돋보였다. 그 결과 이명박 대통령의 '역사 후퇴시키기' 속도전을 일단 막을 수 있게 됐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만은 확실하다. 오랜만에 박수를 쳐 칭찬을 해주고 싶은 대목이다.
반면에 이번 사태의 최대의 패배자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MB는 1970년대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주요 건설공사들을 오히려 공기를 단축해 끝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공에 기초해 월급쟁이로 최단 기간내에 CEO에 오르는 등 MB신화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이 같은 자신의 성공신화와 한나라당의 다수 의석에 기초해 속도전, 돌격전을 내세운 공기단축의 '노가다 정치'에 나선 것이다. 즉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그 내용을 잘 모르는 85개의 법안을 제대로 된 심의도 없이 날치기 통과시켜 역사를 되돌리려는 강공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정치를 단순히 공기를 단축해야 할 건설공사 정도로 간주하는 이명박식 노가다 정치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 ⓒ뉴시스 |
사실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는 노가다 집단에 불과해 MB의 구상대로 나가는 것 같이 보였다. 소위 한나라당 내의 개혁파는 어디로 간 것인지 다 사라졌다. 박희태 '십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여권의 야전사령관인 홍준표 의원 역시 평소답지 않게 '십장'을 못 벗어나 MB의 지시에 따라 강경론을 고수했다. 한나라당내 야당의 사령관인 박근혜 의원까지 침묵을 지켰다(박 의원이 침묵을 깨고 청와대의 강경노선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사태가 사실상 끝나고 난 뒤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예상 밖으로 한나라당으로부터 빨리 배워서 유능해지고 투지를 회복했다. 게다가 김형오 국회의장이 MB 노가다팀의 십장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결정타를 날렸다. 김 의장이 직권상정을 거부하자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배신자라고 칼을 갈았다. 그러나 김 의장의 말대로 "85개 법안중 대다수가 아직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는 이른바 쟁점법안의 내용조차 잘 모른다. 그런데 의장이 무더기로 직권상정, 처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다. 정치는 노가다판이 아니고 국회의장은 건설현장 소장이 시키는 지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노가다 십장이 아니다. 노가다판과 달리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국민이 모르는 법안을 무더기로 직권상정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김 의장의 항변이 보여주듯이 결국 그 민심이 김 의장으로 하여금 MB의 십장이 되기를 거부하게 만든 것이다.
이번 실패를 교훈삼아 이 대통령이 정치는 노가다판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노가다 정치를 넘어서기를 기원해 본다. 그렇다면 이번 실패는 이 대통령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이 대통령도, 대한민국도 덜 불행해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같은 가능성은 별로 적어 보인다. 노가다 정치에 대한 반성보다는 홍준표 원내대표 등 원내지도부에 대해 십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성토와 문책론이 난무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노가다 정치,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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