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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윤규'의 화업(畵業)에서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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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윤규'의 화업(畵業)에서 길을 묻는다

[김상수 칼럼]<29>자연성((自然性)으로의 회화

이름이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다. '박윤규' 화가, 그는 이름을 알리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이면서 줄곧 30여 년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나는 화가 '박윤규'의 그림을 너무 뒤늦게 '발견'했다. 우연한 만남이었다. 강원도 최용건 화가의 '하늘밭 화실'(http://www.hanlbat.co.kr) 웹사이트를 통해서 처음 그를 만났다.

내가 본 '박윤규'의 그림은 색감과 색채가 풍요하고 따뜻했다. 풍경과 정경과 사물을 주로 구상의 수법으로 또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자연스레 넘나들며 그렸는데, 한국의 화단현실에서 이렇게 독특하고 빼어난 구상과 추상의 화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에겐 '발견'이었다.

그의 초기 그림인 '하숙방의 아내' 인물화에서는 이제 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화가의 무사도(武士道)의 긴장이 그림 속에서 느껴져 오는데, 이는 그가 그림을 마구잡이로 시작한 게 아니고 아주 반듯하게, 다른 말로는 예도(藝道)로부터 그림을 시작한 것 같은 분위기가 그림 속에서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 1978, 춘천 샘밭 하숙방에서 아내, 46x38cm, oil on canvas,

1978년 전문의를 취득하고 군에 입대했으며 결혼 3년차였다. 월말이면 아내는 기차타고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마장동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왔다. 마지막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소양댐 가까이 있는 샘밭까지는 총 약 8시간이나 걸렸다. 하여 우리들은 흔히 말하는 월말부부였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이 춘천의 멋진 곳인 공지천등에는 데려가지 않고 대구에서 올라온 저녁, 백열등아래 하숙방의 벽에 기대게 하고선 그림만 그렸다. 당시에 나는 뎃상 공부를 마치고 유화를 그리려고 그림 소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중이였는데 공짜 인물모델이 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이제야 그림속의 아내 얼굴을 다시 보니 화가 난듯하다. ⓒ박윤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회화에 있어서의 나름대로의 문법을 의식하며 차곡차곡 순서를 밟아나간 것 같은 궤적(軌迹)을 그의 그림의 이력에서 한 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시간의 경과는 90년대 초반부터 자기 나름의 회화 방식과 특유성으로 자리 잡기시작하면서 그만의 회화성(繪畫性)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그의 그림은 어떤 그림보다도 자연 속에서 자연성을 지닌 채로 넉넉하게 숨 쉬고 살아있다는 점에 소중함이 있다.

그렇다. 나는 숨 쉬는 그림을 만났다. 그림 속에 공기는 맑고 투명했다.

푸른 하늘, 숲, 나무, 산사(山寺), 바다, 항구, 강, 물빛, 인물, 꽃, 특히 꽃을 그린 채색의 빛은 나에게 음악의 화음을 들리게 했고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의 그림 중에서 96년에 그린 '유가사의 가을' 과 '솔밭에서'에서부터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과감하게 허무는 작가로의 '도전'과 그의 '시도'를 본다. 그리고 98년의 '통영항구' 2004년의 '숙화실에서'의 꽃그림과 2006년의 '임포항'과 '홍화', 2008년의 '정원'에서는 경지(境地)로서의 '차원의 미술'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뚜렷한 작가로의 화가를 대면하는 기쁨과 함께 그림이란 장르가 주는 놀라운 즉물성(卽物性)에 새삼 나는 자극까지 받는다.

▲1996, 유가사의 가을에, 33x24cm, oil on canvas
이 그림은 동양화처럼 화면을 땅바닥에 두고 밑칠 없는 흰 켄버스 위에 그려 갔다. 한참 그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와 그 어머니가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말이 들렸다. " 너는 저 그림 보다 잘 그리지?" " 물론 저 아저씨그림보다야 잘 그리지" 이를 듣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 그림으로 앞으로 나아 가야할 방향을 조금은 알 듯도 하였다. ⓒ박윤규
그림에는 화가의 인품도 엿보였다. 세상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가 그의 그림에 조용하게 내재되어 있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보여 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그림뿐입니다.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간직해 온 일기를 남들 앞에 내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부끄럽습니다."

지난 4월 4일부터 10일까지 대구시내 갤러리'쁘라도'에서 30여년 화업으로는 이제 첫 전시회를 했을 때 대구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 1998., 통영항구 ⓒ박윤규

'부끄러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잠시 그림에 대한 얘기로부터는 확장되지만 그림과 인생이 별개가 아니고, 그림과 세상이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내다보며 그림으로 세상을 말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영성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응하고 대응하는 심리적인 태도이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림을 그리든 무엇을 하든, 뭔가 혼자서 내밀하게 자기 진행을 할 뿐인데, 과시(誇示)나 드러내어 보이는 현시(顯示)가 아닌, 자기 작업과 자기 진술을 세상에 비로소 내보일 때, 한 생명으로 한 사람으로 한 예술가로 한 화가로 여간 조심스럽고 떨리지 않았겠는가.

이렇듯이 '부끄러움'이란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방식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이미 '부끄러움'은 '뻔뻔함'으로 대체되었고 갖가지 이유와 설명과 논리, 주장과 주의로 세상을 감히 '평정'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자가당착을 일상사로 듣고 본다.

이렇듯 인간들 일상의 대부분은 '부끄러움'보다는 '뻔뻔함'이 지배하고 착취한다. 그래서 세상은 인류의 상황은, 거의 전면적인 위기상황이다. 정치, 경제뿐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마음'이란 피폐하고 남루하다. 여기에 이제 인간은 시(詩)의 마음까지 잃은 지가 오래다. 아마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점점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시점인 것 같다. 인간들이 이대로의 경제방식으로 생산과 소비를 일삼는 삶을 계속 꾸린다면 머잖아 세상에서 절멸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림이든, 예술이든, 정치든, 또 학문이든, 요즘 내 생각은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고 최소한의 인간으로의 자질 같은 것으로, 그 '요소' 같은 것을 자주 생각해 본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아파하는 것, 부끄러워하는 것, 슬퍼하는 것, 더하여 '겸손'은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마음을 연다. 하물며 그림으로 마음을 열고 있다면 예술이 삶속에 이미 스미어 있는 것인데.

한국의 문화 예술 현실에서는 세상을 살면서 인간의 올바른 역할이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크게 부족하거나 거의 없다. 현대의 예술사가 짧고 가난해서 그런지, 좀 이름이 있거나 이름을 내려고 안달하는 예술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 이들의 예술과 행태를 조금만이라도 들여다본다면, 나이 육십이 넘어도 십중팔구는 천박하거나 유치하다. 평생을 '도배지'나 그리고 흉내 내는 예술을 하고 있으면서 매명(賣名)으로 돈을 쫒으며 '관념'으로나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한다. 정신적으로는 너무나 '빈곤'하다.

▲ 1996, 솔밭에서 ⓒ박윤규

많은 기회와 많이 가진 게 절대 우월한 게 아님을 잘 모른다. 많이 가지고 많은 기회를 사용할 수 있음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서 큰 고급 외국차를 타고 다니는 건 잘난 게 아니고, 한참 무지하고 덜떨어진 바보라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낼 뿐임을 알 턱이 없다.

이런 자들에게는 신성한 것, 영혼 같은 것이 세상에 존재하며 예술은, 그림은, 그걸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는 잘 알아듣지를 못한다. 더 뽐내고 더 뻐기고 더 근사해 보이고, 더 잘 난체 하는 걸 계속 유지하는 조건, 이런 '폼생폼사'가 평생의 과제다. 불쌍하다.

내가 '발견'한 '박윤규'의 그림에는 무엇보다 겸손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나친 상찬(上贊)만은 절대 아니다. 그림이란 그냥 보면 딱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의 그림에는 풍경과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끈덕짐이 배어있다. 그림을 그리는 대상은 변화하고 그림을 그리는 회화의 방법에서도 변화를 일으키지만 그림에는 한결같은 '따뜻한 마음에로의 동경'같은 '자연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도 이 '자연성'에 깃들어 검약한 절제의 마음이 묻어난다.

이런 박윤규와는 달리, 서른일곱 살 때 세상에 절망하고 일찍 죽은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는 '자연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양 출신사람이라 육고기를 즐겨 자주 먹어서 그런가.

그는 말하기를, "그림을 그리는 대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하물며 그림이란 재구성하고 변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면 좋다. 그 '부정확성'을 나는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고 부르겠다면, 그대로도 좋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이 없는 진실보다는 더 진실한 거짓말이다"라고 했다. 대단한 이론가다, 고흐는.

27세부터 37세까지 꼭 10년 동안 화가로 살다 죽은 고흐는 죽기 전 마지막 70일 동안은 매일 한 점씩 그렸고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마지막 그린 70여점의 그림에는 보이는 대상을 철저하게 '자기가 보는 방식'으로 밀고나갔다. 구상으로부터 놀라운 추상으로의 전환이었고 대범했다. 고흐는 미술을 통해서 근원에 대한 의문을 지녔고 본질에 대한 질문을 남겼지만 과격한 인위(人爲)였고 당위(當爲)의 그림이었다. 당연히 깊은 '자연성'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반대로 나는 화가 박윤규의 그림에서는 추상의 그림에서도 '자연성'을 잃지 않음을 본다.

이는 정신적인 자질인가? 아니면 수행(修行)인가?

화업 30여년의 화가에게 나는 길을 묻는다. 어디로 가야하는 건가요?

▲ 2004, 숙화실에서 ⓒ박윤규
▲ 2006, 임포항 ⓒ박윤규

▲ 2006, 홍화 ⓒ박윤규
▲ 2008, 정원 ⓒ박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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