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중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전국연합학력평가, 이른바 일제고사를 앞두고 일부 학부모들이 시험을 거부하고 체험 학습을 선택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일부 교사도 학부모의 선택권을 안내하는 통신문을 일제히 발송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교사로 재직 중인 이계삼 교사가 '23일 일제고사 대신 체험 학습을 선택함으로써,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육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자'는 호소를 담은 기고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이 기고 자체가 또 다른 징계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나, 이 교사의 뜻을 존중해 전문 싣는다. <편집자> |
▲ 사랑하는 선생님이 내쫓기는 모습을 보는 아이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어느 영국 시인은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한다"고 읊었지만, 저들은 울부짖는 아이들 앞에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교문의 빗장을 내리잠근다. ⓒ프레시안 |
아이들의 눈물 앞에서…
개인적으로 이런 기억이 있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로 옮길 무렵, 전임지였던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봄방학을 앞두고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수업을 하던 날의 기억이다. 그때 나는 그 학교 안에서 겪은 여러 일들로 몹시 피로했고, 고향이 그리웠고, 그래서 고향에 있는 학교를 옮겨가는 그 순간은 사실 흔쾌했다.
그런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는데, 뜻밖에도 이제 고3으로 올라 갈 다 큰 녀석들이 찔끔찔끔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괜한 겸손이 아니라, 당시 나는 녀석들에게 '좋은 선생'이 못 된다는 심한 열패감에 빠져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은 편지를 써서 내 자리위에 올려두었고, 정성껏 만든 선물들을 전해주었다.
헤어지는 순간에는 많은 아이들이 울었다. 그때 나는 내 흔쾌함을 뉘우쳐야 했고, 거기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 아이들의 순정 같은 것,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그 나이 때에는 어쩔 수 없는 순정 같은 것, 이별의 순간에 문득 폭발하고 마는 순정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요즘 신문을 보면 심란하다.
일제고사에 대한 선택권을 학부모·학생에게 부여했다는 이유로 일곱 명 선생님들이 교단에서 쫓겨났다. 이 분들은 이 시험을 주관한 교육과학기술부 관리들도 생각지 않았을 교사의 평가권과 학부모·학생의 선택권 문제를 가장 지혜롭게 풀어내었기 때문에 상을 줘도 모자라는 분들이다.
그런데 그 일로 사랑하는 선생님이 내쫓기는 모습을 보는 아이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어느 영국 시인은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한다"고 읊었지만, 저들은 울부짖는 아이들 앞에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교문의 빗장을 내리잠근다.
일제고사, 기를 쓰고 추진하는 까닭
사실 말이지만, 이 형편없는 교육 체제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저 아이들의 순정 때문이다.
부모는 '매니저' 노릇을 자임했고, 아이들은 매니저의 감독 하에 하루 종일 수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는 '연예인' 노릇을 해왔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꿈을 꺾어야 했고,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했고, 무력하고 안일한 수업 속에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같이 급식 먹고, 장난 치고, 팔짱을 끼고 매점엘 가고, 먼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 농구공을 다투는 친구들과의 우정 때문에 이 가혹한 나날들을 견뎌왔던 것이다.
일제고사는 아이들이 골백 번 치르는 시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시험이 같은 시험이 아니다. 일곱 분 선생님들의 상식적이고 지혜로운 행동이 성추행보다 훨씬 무거운 '죄'로 받아들여질 만큼 일제고사는 특별한 '전략적' 의미가 있다. 일제고사는 우리 교육이 그나마 '공(公)'자가 붙은 교육으로 기능하기 위해 '몰라야 하고', '알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그래서 각 학교의 개별성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마지막 겉옷'까지 남김없이 벗겨 버리는 시험이다.
이 시험은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똑같이 치르고, 그냥 치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2010년부터 인터넷에 공시하게 되고, 2011년부터는 개별 학교의 전년도 대비 향상 정도까지 공시하게 된다. 결국 모든 학교들은 이 시험 결과로 인해 일렬로 줄을 서게 된다. 몇 시간동안 치르는 5지선다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인간적 역량과그 학교의 교육적 역량의 극히 편협한 일부일 뿐이지만, 그로 인해 그 아이가 속한 학교의 교육 과정, 교사들의 역량, 사회적 위상, 그리고 그 학교가 속한 주거지의 등급까지 송두리째 규정된다.
억측이라고? 전국 단위 학업성취도 평가는 이미 미국과 영국의 교육 체제를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로 정착시키는 데 가장 핵심적인 고리 역할을 했다. 이제 전국 단위 학업성취도 평가를 앞두고 '평균을 갉아먹는' 아이를 일부러 결석시킨다는 영국 학교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재현될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 우리 교사들이 선생 노릇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깝깝했다. 그런데, 여기다 대체 무엇을 더 얹어 놓겠다는 말인가.
23일, 일제고사를 거부하자
조지 W 부시에게 신발을 던진 스물 아홉 살의 이라크 청년 문타다르 알 자이디를 생각한다. 부시는 육순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동물적인 반사 신경'으로 두 번 다 피했지만, 문타다르가 끌려나간 뒤 썰렁한 농담으로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모두가 잠시 얼이 나가 있었던 것일까? 문타다르의 행동에 담겨 있는 준열한 기운이, 그가 상기시킨 그 더러운 전쟁의 참상이 아무도 웃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타다르의 신발은 부시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공정택 교육감의 머릿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공정택 교육감, 그 분이 당선 후 맨처음 했던 말은 "이제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쟁을 시켜야겠다"는 말씀이었다. 아, 정말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 분은 알고서 하신 말씀일까? 초등학생 세 명 중 한 명이 자살을 생각해봤다고 하는 이 나라에서 더 이상 무슨 경쟁을 더 어떻게 시키겠다는 말인가.
아이를 둔 부모들이 만나 술을 마시면 열에 아홉은 교육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의 기운들이 만분의 일이라도 조직되었다면 이렇게까지 처참한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라고도 한다. 자신과 자기 자식에게만은 별 일 없이, 그저 넘어가기를 바라는 그 마음들 때문에 지금껏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12월 23일, 다시 중학교 1학년,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제고사가 시행된다. 7차 교육 과정은 학부모가 동의한 학생의 현장 체험 학습을 보장해주고 있다. 일제고사는 모든 학생들이 반드시 봐야 한다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그날 아이의 손을 잡고 일제고사 시험지 대신 파란 하늘을, 혹은 우리들 삶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도 좋고,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이 다녀간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도 좋을 것이다.
그날 저녁, 이 '미친 교육'을 염려하는 시민들은 한데 모여 촛불을 들자. 끝간 데를 모르는 이 '미친 질주' 속에서 빠져나올 후련한 희망의 기운을 느낄 것이다. 아, 이제는 정말 희망을 찾고 싶다. 나는 이 한 마디를 호소하고 싶었다.
"12월 23일, 미친 교육을 향해 신발을 던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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