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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셔야 한다, 일으켜 세우고 연대해야 한다"

[김상수 칼럼]<28>정치인 노회찬을 새삼 주목하는 이유

멀리 독일 베를린에서 보는 어제 오늘 한국의 뉴스는 참담하다. 21세기에 한국은 지옥을 살고 있는가.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리고 학부모와 학생들의 의견을 물어본 교사들을 파면 해임시키는 서울시교육청이란, 그 팻말부터 고쳐야 한다. 명색이 교육 '자'가 붙은 교육의 공적 기관으로는 이름이 너무 무색하다. 교사와 학생을 보호하는 게 아니고 내치는 교육기관이란 명과 실이 근본에서부터 한참 틀렸다.

더하여 여당인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등 야당 의원들의 회의장 참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채 외교통상통일위원회를 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의 상정을 독단으로 처리했다는 뉴스는 의회민주주의란 말 자체를 시쳇말로 만든 폭거이자 폭력집단의 행동과 다름없다. 이는 정치적 결사체인 정당의 정치수행일수 없다.

파행이 일상사고 다반사라 무감각인가?

여기 독일에서 한국에서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면 일개 정권은 고사하고 전 시민이 쏟아져 나와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왜, 한국은 이 지경인가? 자,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자. 바로 이명박 정권이다. 빙빙 돌리지 말자. 다시 말한다. 문제의 시작과 끝은 이명박이다. 이명박을 내세운 '사익추구집단'의 횡포는 지금 끝을 모른다. 이제부터 이들의 폭력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들의 막가파 공세는 지난 여름 '촛불' 이후, 불안, 초조, 안달에 기인한다. 권력을 잡았으니 놓치고 싶지 않고,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막다른 수세로 몰린 상태가 일제히 공세로 돌변했다. 이명박이 허리를 숙이고 '사과'와 '송구'를 말한 건 절대 국민이 그 대상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기득권층에 허리를 숙인 것이고 자기를 밀어준 기득권 세력에 권력을 유지하는 수법에서 요령부득이었음을 '사과'한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과 같은 파열은 있을 수 없다.

좀 더 근본에서 들여다 보자면, 이는 곧 한국사회 정치의 실종을 뜻한다.

정치란 사회 구성체의 문제를 드러내어 갈래를 잡고 갈등을 해결하고자하는 '이성적인 통로'가 정치다.

정치는, 정치의 요체는,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삶의 공동체를 정의롭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나날이 살고 있는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사람으로 납득할 만한 환경과 삶의 조건을 기본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개개인과 사회전체의 평등한 기회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원리를 사회통합의 이치(理致)로서 해결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방법이 곧 정치다.

그런데, 이게 무너진지 해방 이후 수십 년, 김대중 노무현이 지난 10년간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그 틈새로 이명박이 기득권층 대표선수로 튀어나왔다. 국민일반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 자체를 김대중 노무현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선택의 대안은 비좁았거나 마땅치 않았다. 이미 정치가 실종되고 나서 대통령선거니 국회의원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정동영을 찍기에는 집권당과 노무현이 너무나 미덥지 못했고, 대선 이전부터 대세는 '부자 되세요!'가 사회 일반의 관용어가 될 만큼 천박 무인지경이었다.

삶에서 과정이나 수단, 방법은 문제 삼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뿌리 뽑힌 '경제잡민' 수준으로 국민 일반이 추락했음을 뜻했다. 물론 국민 일반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잡민'과 '시민'을 구분할 용의는 나에게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프레시안> 칼럼으로, 너무나 온건하게, 이명박의 등장 원인에는 김대중 노무현에게 지난 10년 실정의 실질적인 책임이 있음을, 그 정치적 패착과 과오를 용서할 수 없음을 누차에 걸쳐 얘기한 바 있다.('잃어버린 10년'에 닥쳐올 파국은 과연 몇 년?)

최근 전대통령 김대중이 이른바 '민주연합론'을 설파했다. 이는 맞는 얘기지만 김대중의 입에서 나온 얘기기 때문에 틀렸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대통령직에 있을 당시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았다. 최소한 전두환 노태우 이후,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지녀야하는 기본조건을 만드는 것에 충실했다면 오늘 이런 고역만큼은 국민들이 겪지 않는다. 기회와 시간을 다 잃고 나서 '민주연합'이라고?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말이란 적용에 때가 있고 쓰임이 반듯해야 한다. 따라서 전 대통령 김대중의 말은 틀렸다.

기실, 군사독재 이후 김영삼의 언필칭 문민정부 시절부터, 야당은 민주주의 연합세력이 아니라 기득권연합을 통해 집권했다.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 야합을 통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김대중은 김종필, 박태준과 함께 DJP연합을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 보수연합? 말장난 하나, 기득권 층 연합이 그 실체다. 노무현 또한 정몽준과 야합한 결과가 어긋나면서 어부지리 대권을 잡았다. 이처럼 현재의 야당은 민주주의 실천 세력과는 무관하게 사이비 민주세력과 기득권 세력, 그들 연정의 한계가 본질이고 정체다.

전대통령 김대중이 대통령선거에 나왔을 때, 이제 김대중이 정권을 잡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식이었다. 이는 마치 이명박이가 정권을 잡으면 '경제를 살리겠다'는 호언장담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정권을 잡고 나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개혁과 변혁적 관점이란 아예 없었다. 이를테면 김대중은 말로는 민주화를 떠들었지만 민주화의 구체적 비전-상(相)-이 없었다. 치명적인 패착이었다. 김대중이나 이명박이나 대선의 결과란 우르르 몰려가서 무조건 찍고, 찍어주면 뭘 해주겠지 하는, 기대와 실망의 배반에는 판별성이 없으리만큼 대동소이했다. 따라서 김대중은 노무현만큼이나 실질적인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여파가 바로 오늘의 이명박 현실이다.

절차적 민주주의나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발전이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사회 경제적인 부분을 집요하게 개선시키는 것에 노력을 기울여야 옳았다. 소득의 양극화, 비정규직과 실업 문제 등. 피 흘려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문제의 개선에 더 집중해야 옳았다. 여기에 모든 걸 맞춰야만 했다. 이게 사람 사회의 정치였고 '착한사람들의 분노'를 헤아릴 수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김대중 때나 노무현 때나 시장주의, 성장주의, 결과주의로만 내달렸다. 그 반대의, 대안의, 실재로의 사회적 삶의 통합의 길을 걸어 가 본적이 없고 민주주의를 실천해 본 사실이 없다. 서민의 고통과 불만을 정책의 대안으로 구체적으로 세워 본 사실조차 너무 부족했거나 거의 없다. 서민의 결핍을 걸러내고 담아낸 정책이 없다. 진보? 보수? 웃기는 얘기다. 진보라서 김대중 노무현을 찍었나? 보수라서 김대중 노무현을 거부했던가?

정치가, 정치의 언어와 행위가, 내용과 실체가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말과 행동이, 언어와 몸이, 따로 놀고 있음이 문제였다. 정치가가 필요했지만 정치를 업으로 하는 정치꾼과 정치인만이 득실거렸다.

심상정과 노회찬

▲ 지난 여른 촛불집회에 참석한 심상정(오른쪽 두번째), 노회찬(오른쪽 끝) 진보신당 공동대표(ⓒ뉴시스
잘러서 말하겠다. 나는 지금 심상정과 노회찬을 주목한다.

정치언어와 몸이 괴리가 적은 정치인이 그나마 몇뿐인데, 심상정 노회찬에게 지금부터 더 확연하게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행동할 것을 시민의 한 사람으로 나는 주문하겠다.

오늘은 먼저 노회찬에게 주문한다.

물론 노회찬에겐 벅찬 주문이고 억울한 주문이다. 아니, 천하에 김대중도 못했고 노무현도 못했는데,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떨어진 노회찬이한테서 민주주의 정치실현에 대한 기대와 주문까지 한다? 그렇다. 나는 노회찬한테 주문하고 기대한다. 서민의 고통을 끌어안고 나설 수 있는 희소한 정치인 중에서 그나마 노회찬에게 제대로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음은 그가 노동의 일반적인 조건을 그나마 알기 때문이다. 지식인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영등포기계공고 부설 서울직업학교에 들어가 전기 용접 2급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노동 현장에 투신한 전력은 바로 재벌 삼성의 이건희를 재판정으로 끌고 나올 수 있는 근거였다.

지금 절실하게 요청되는 정치는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자기 마음으로부터 느끼고 그들 일상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같이'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일상을 사는 한국인들의 괴로움을 자기 고민으로 받아들이면서 같이 '울음'을 울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치의 기본과 도리에서 한 치 어긋남이 없는 명제다. 지나친 숙제이고 주문인가, 왜 하필이면 오늘 새삼 노회찬인가?

적어도 노회찬은 지난 그의 인생살이에서 사회적 소수가 되는 입장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적어도 노회찬은 정치를 하면서, 누가 어떤 식으로 어떤 형태로 파당(派黨)을 만드는 가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적어도 노회찬은 정치행위와 정치활동이란 것을 그릇된 명분만을 앞세워 뿌리 깊은 금력과 권력의 추구를 탐하면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서로 덮어주고 정당화시키며 강화해 주는 논리의 억지나 너스레를 말하지는 않았다.

몇 년 전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이, 노무현을 비롯한 모든 기존 정치 세력들, 정동영, 손학규, 박근혜 등, 수많은 정치인들이 황우석 사건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발뺌하기에 바빴지만 노회찬은 달랐다.

또한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당을 떠나서 정치가 위기에 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정치 주체의 역량을 키우지 못한다면 죽도 밥도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이다.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정세를 이끌고 주도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래서 노회찬은 정치적 말과 힘이 진실의 편에 있지 않을 때, 시민의 편에서 정당하게 발휘되고 있지 못할 때, 말은 지리멸렬해지거나 표리부동해 진다는 사실도 안다. 그 땐 이미 정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노회찬은 정치는 국민들이 마음으로부터 동의하며 국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힘에서 기초한다는 명제를 안다. 따라서 노회찬은 정치행위를 단순한 게임이나 공작, 또는 정치 수사에 함몰되는 차원이 아닌, 정치 자체가 한 사회를 여과하는 장치임을 믿고 있으며 적어도 노회찬은 작금의 경제적 재난과 거듭되는 일상의 혼돈에서 국민들이 힘들어 하고 국민들의 피눈물 앞에, 겸허하게 말을 건네고, 묻고, 따지며, 귀를 기울이는 양식이 바른 정치적 활동의 시작임을, 최소한 그것이 정치인의 요건임을 그는 안다.

적어도 노회찬은 오늘날 닥친 위기의 근본이 오직 경제만의 위기가 아닌 보다 깊고 지속적인 위기는 문화의 위기임을 안다.

따라서 그는 문화의 위기는 실존의 위기이며 경제위기 또한 이것에서 파생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과연 실제적인 민주정치의 토대인 삶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개선하는 것에 더 파격적이고 광범위한 이바지를 할 수 있는 인물인가를 제대로 따져보아야 함은 물론이고, 전국회의원 노회찬이 이에 해당하는 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나마 양질의 정치인을 손꼽아본다면 너무나 희소하기 때문이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이명박 이후의 대안으로 정치인의 부재를 말하기 이전에, 정치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이나 정치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노회찬을 현실 정치인 중에서는 판별해 내자고 주장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누군가가 국가 방향의 진로를 획기적으로 틀어야 한다. 시스템 전환을 주장해야 한다 말이다. 진정한 정치란 무엇인가, 사회의 변두리에서 주변화 되고 배제됐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을 일궈낼 수 있는 역할이야말로 요청되는 오늘의 정치인이고 정치가다. 경제위기로, 삶의 위기로, 삶의 불안이 날로 심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절실하게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먼저 노회찬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으로 선택가능한 정치적 대안을 조직해내야만 한다. 한계에 직면한 현실정치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전 진부하고 지리한 김대중 김영삼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야 한다.

오늘 한국을 사는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자신들의 능력 없음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차렸다. 더욱이 한국이 당면한 경제 문제가 자신들의 무능에 기인하지 않음도 간파하기 시작했다. 오늘 한국인들의 삶의 고통을 줄여나가는 시스템적 전환으로 정치에 중요성을, 곤궁의 처지에 놓여 진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주체가 될 힘과 능력이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그들과 같이 연대할 수 있음이 살아있는 정치적 행동이자 요청되는 당위다. 진실한 정치는 배제된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에서 정치의 본령을 비로소 찾게된다.

정치란 노선이 있어야 한다.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 비전은 들리고 보여야 한다.

나는 지난 미국대선 직후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한 연설 내용 중에서 이 두 개의 대목을 특히 주시한다. 이 연설 부분은 정치인 노회찬이, 이제 정치인에서 정치가로 거듭 날 수 있는 요건이자 실마리일 수도 있기에 여기에 인용한다.

It was built by working men and women who dug into what little savings they had to give five dollars and ten dollars and twenty dollars to this cause. It grew strength from the young people who rejected the myth of their generation's apathy; who left their homes and their families for jobs that offered little pay and less sleep; from the not-so-young people who braved the bitter cold and scorching heat to knock on the doors of perfect strangers; from the millions of Americans who volunteered, and organized, and proved that more than two centuries later, a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has not perished from this Earth.

우리의 선거운동은 얼마 되지 않는 저금을 뒤져서 5달러, 10달러, 20달러를 이 정신에 기부해준 노동계층의 남녀들에 의해 꾸며졌습니다. 우리 선거운동은 무관심이라는 동년배들의 신화를 거부한 젊은이들로 인해 힘을 얻었습니다. 또 월급은 적고 잠잘 시간은 더 없는 변변치 않은 일을 위해서 집과 가족을 떠나온 사람들로 인해 힘을 얻었습니다. 엄청난 추위와 푹푹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린 그렇게 젊지만은 않은 분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또 200년이 넘도록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원봉사에 임하고 조직을 만든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힘을 실어줬습니다.

The road ahead will be long. Our climb will be steep. I promise you. we as a people will get there.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길고도 멉니다. 우리가 올라야 할 산은 가파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 그 목표에 이를 것입니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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