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경제 수석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가 한국은행을 향해 쓴 소리를 내뱉었다. 한국은행이 뚜렷한 이유 없이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 발표를 늦춘 것을 향해서다.
한국은행은 지난 12일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2.0%로 전망했다. 당초 9일 발표하기로 돼 있던 게 이틀 연기됐다. 그 사이인 지난 11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1.0%포인트 낮췄다. 이로써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치인 3.0%가 됐다. 파격적인 기준금리 인하 조치와 경제성장률 전망치 발표 연기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게 세간의 해석이었다.
김태동 교수 역시 이런 해석에 힘을 실었다. 김 교수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그가 실제로 금통위 결정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
김 교수는 15일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한국은행의 성장률 전망치를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을 원숭이로 전락시킨 한국은행"이라는 글에서 그는 "이 전망치(12일 발표한 성장률 전망치)가 원래 예정대로 9일(화요일) 발표되었다면, 나는 응분의 신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별 이유없이 사흘이나 연기된 뒤에 내년 예측이 발표되어 출생하자마자 사망선고가 내려진 전망이 돼 버렸다"라고 적었다.
내년도 성장률에 관한 어두운 전망치 발표가 낳을 파장이 두려웠던 나머지, 정책결정권자와 시장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금리 인하 조치를 먼저 내놓은 뒤에 성장률 전망치를 발표했다는 것. 이처럼 정치적 고려를 거친 끝에 나온 성장률 전망치는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어 김 교수는 "11일(목요일) 금통위 정기회의에 앞서 관행대로 내년 성장률 전망이 발표되면 "금리정책 운용의 폭을 줄일 수 있음을 우려했다"는 것인데, 내 머리로는 '높은 분들 마음에 안들었다'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뒤따른 내용은 이렇다.
"짐작컨대 발표가 무산된 원래 예측치에는 성장률이 1%대이었을 것이다"라며 . 그것이 예정대로 발표되었으면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위 분들은 예측치의 사후 정확도 제고, 그로 인한 한은 신뢰도 유지와 통화정책의 유효성 유지,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나 보다. 예측 발표후 즉각적인 반응이 두려웠던 것이다. 시장의 반응보다 정부의 차가운 반응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미래를 솔직하게 전망하기보다 시장과 정부 고위층, 특히 정부 고위층의 불안을 달래기에 급급해보이는 한국은행의 이런 행태를 가리켜 김 교수는 '조삼모사(朝三暮四)' 고사의 주인공에 비유했다. 원숭이들은 듣기 싫은 소리를 나중에 듣기를 원한다. 한국은행이 국민을 '조삼모사' 고사 속 원숭이로 취급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누군가는 싫은 소리를 감수하고라도 냉정한 전망치를 내놓아야 한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대개 이런 것이다. 중앙은행이 여론과 권력의 눈치를 보면, 통화정책이 제대로 될 수 없다. 김 교수는 과거에도 한국은행이 독립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위기가 닥쳤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김 교수의 글 전문이다.
대한민국을 원숭이로 전락시킨 한국은행
현 이명박 대통령정부는 국가기관의 하향평준화에 뛰어난 업적을 거두고 있다. 정권발족 직후부터 환율의 인위적 상승 유도를 '애국'이라고 자화자찬하더니, 연말을 앞둔 현시점에서 국가기관으로서 신뢰도가 추락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기획재정부 뿐만 아니라 국회, 감사원, 검찰, 경찰, 여타 정부부처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거기에 언론과 은행의 재벌 지배 허용, 신문의 방송 겸영 허용 등 사회 저질화에 거침이 없다. 참으로 2008년은 주권자(일제 용어로 국민)들이 견디기 힘든 한 해였다.
주권자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아무데도 없다. 이제는 분명 한국은행도 아니다.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통해 통화가치를 안정시켜야 하는 책무를 지닌 기관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권자 소득의 실질가치, 주권자 땀과 열정과 창의의 가치를 안정시켜야 하는 기관이다. 지난 상반기만 해도, 기획재정부의 우왕좌왕하는 환율정책에 가끔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아니다.
한국은행은 지난 12일(금요일) 내년 경제성장률이 2.0%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나는 이것을 믿을 수가 없다. 이 전망치가 원래 예정대로 9일(화요일) 발표되었다면, 나는 응분의 신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별 이유없이 사흘이나 연기된 뒤에 내년 예측이 발표되어 출생하자마자 사망선고가 내려진 전망이 돼 버렸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2006년봄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나는 연간 경제전망을 준비하는데 한국은행 조사국 담당직원들이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고 지혜를 짜내는지 잘 안다. 그렇게 최고 수준의 직원들이, 적어도 몇주 동안 최선의 노력을 해서 준비한 자료가 연간 경제전망이다. 그것을 들고 집행부에 부총재보, 부총재, 총재에게 차례로 보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재도 아니고 부총재도 아닌 금통위원 5인에게 월요일쯤 보고하였을 것이다.
민간회사에서 내년 매출액과 순이익을 전망하여 보고한다고 하자. 그런 예측을 담당한 부서는 회장, 사장등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비관적인 사업전망은 보고자의 목을 달아나게 할 수 있다. 경제부처 내의 예측, 경제부처의 청와대 보고도 비슷하다. 잘못된 관료주의가 연말에 내년전망을 할 때에 회사의 기획담당 임직원, 정부 각 부처의 기획담당 공무원 들에게 큰 고민거리를 안기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경제예측은 그래서는 안 된다. 윗사람 눈치보고 나오는 아부성 예측이어서는 안 된다. 국내외 여러 예측기관중 뒤에 상대평가를 했을 때, 제일 정확도가 높아야 한다. 예측은 어디까지나 예측인 만큼 한해 한해 따로 떼어 보면 맞는 해가 한 해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의 가치, 즉 주권자의 가치를 책임진 기관에서 하는 예측이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에서 평균적으로 타기관에 뒤쳐지는 예측을 한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우수한 예측을 위해서는 더 우수한 인재가 더 훌륭한 환경에서 예측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료주의적 예측이어서는 안 된다. 예측부서의 독립성이 정확도 높은 예측의 필요조건이다.
이번에 왜 한은 예측이 사흘이나 늦게 나왔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보고과정에서 총재가 연기시켰는지, 5인의 금통위원이 연기시켰는지 내막을 알지 못한다. 누가 결정했든 윗 사람이 발표시기를 늦춘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예측 내용까지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관제 예측이 탄생한 것이다.
11일(목요일) 금통위 정기회의에 앞서 관행대로 내년 성장률 전망이 발표되면 "금리정책 운용의 폭을 줄일 수 있음을 우려했다"는 것인데, 내 머리로는 '높은 분들 마음에 안들었다'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짐작컨대 발표가 무산된 원래 예측치에는 성장률이 1%대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예정대로 발표되었으면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위 분들은 예측치의 사후 정확도 제고, 그로 인한 한은 신뢰도 유지와 통화정책의 유효성 유지,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나 보다. 예측 발표후 즉각적인 반응이 두려웠던 것이다. 시장의 반응보다 정부의 차가운 반응이 더 두려웠는지 모른다.
한은의 금통위원 7인에게 장관이나 감사원장보다 높은 연봉을 주고 4년 임기를 보장하는 이유는 정부를 두려워 하지 말고 주권자를 두려워 하라는 취지에서이다. 그러나 현 정부하에서는 총재나 위원의 임기가 존중되지 않을 수도 있고, 연봉이 삭감될 수도 있다는 불안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지 모른다.
졸지에 한국경제는 그리고 한국인은 춘추전국시대 조삼모사(朝三暮四)로 우롱당한 원숭이 신세로 전락하였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격으로 관행대로 금통위 회의 이틀전 9일에 2009년 전망이 1%대로 발표(朝三에 해당)한 뒤, 11일 금통위에서 정책금리를 인하 (暮四에 해당) 하였다면, 원숭이들이 난리를 쳤을 것이다, 즉 시장이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금리인하의 약발도 안 듣게 된다는 것이다. 조삼모사 고사의 저공(狙公)은 원숭이들이 조삼모사에 불평을 표면화하자 조사모삼으로 순서만 바꾸어 어리석은 원숭이들을 속여 넘겼다. 과정만 다를 뿐 결과는 똑같은데 말이다.
한국은행 수뇌부가 생각하고 있는 한국경제는 원숭이 정도의 사고력밖에 못가진 시장경제란 말인가? 그런 인식 하에, 11일 통상수준의 네배에 해당하는 대폭 금리인하를 단행(朝四에 해당)하고, 12일에 2% 성장률 전망(暮三)을 발표하면 시장 혼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인가?
표면적으로 한국은행 수뇌부의 판단은 적중하였다. 9일부터 11일까지 주가가 연속 상승하고, 환율이 하락하는 등 시장은 통화당국의 예상대로 반응하였다. 청와대의 칭찬도 들었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좋은 일만 있을 것인가? 한은에서 예측하는 직원들의 사기는 어떻게 되겠는가? 미네르바처럼 시장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기 보다는, 예측모형의 업그레아드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위분들 눈치보기에 노력하지 않을까? 통화정책은 선제적으로 해야 하며, 그러기에 다른 정책보다 장기예측이 더욱 중요하다. 이번 원숭이 경제전망은 한은의 통화정책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결국 한은의 신뢰도에 큰 흠집을 남길 것이다.
한국인은 원숭이가 아니다. 1%포인트 금리인하를 하고, 이를 근거로 예측직원들이 양심을 유지하면서 성장률 전망을 1%대에서 2%로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렇게라도 믿고 싶다. 이성태 총재가 과장인가, 차장으로 근무할 때, 매우 높은 분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일화를 나는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지금도 많은 이성태가 한은 안에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지키고, 신뢰도를 지키는 버팀목이다.
그러나 하위직원들의 노력만으로는 한은이 필요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 임원과 금통위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총재 자신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주권자는 원숭이가 아니다. 정확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시민으로서, 시장참여자로서 합리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있는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주권자들의 노력으로 97년 말 법적인 독립성이 어느 정도 제고된 한은법 개정이 있지 않았던가? 중고생에게 경제교육시키고, 대학생에게 통화정책 경시대회하는 이유가 무언가?
한은은 주권자의 심부름꾼들에게서 협박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주권자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주권자의 신뢰를 유지하면서…. 잘못은 되풀이 하지 마시라. 정치인의 짧은 시야(time horizon)를 뛰어넘어, 길게 장기적으로 보면서 위기 극복에 나서라. 그래야 빼앗긴 은행감독권을 회복하고 최종대부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한국은행이 거짓세력에게 무너지면, 한국경제가 무너진다. 1997년에 조기에 외환보유액을 탕진한 것은 누구 때문이었나? 그 결과 한국경제도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 뒤에 한은법을 두 번이나 개정하면서 독립성을 강화하였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이 무너진단 말인가? 2천억불 외환보유액 유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권자들로부터의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은은 요새 조삼모사 전망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잘못을 하고 있다. 다른 잘못들,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더 이상 무너지는 모습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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