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
차 한 잔과 대화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만약 차 한 잔이나 술 한 잔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면 서로 서먹하거나 어색할 것이다. 그래서 "차 한 잔 하실까요?" 또는 "술 한 잔 할까요?"라는 말은 상대편과 진솔하게 대화하고 싶다는 우회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게 제안한다고 해서 무조건 대화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제안을 받은 쪽이 바쁘거나 상대편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대화가 성립하기 어렵다. 대화란 일방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고 서로가 대화의 필요성을 느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대화의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대화가 잘 풀릴지, 대화가 싸움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아예 등을 돌리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 이전에 그러나 2008년 12월 현재 남과 북의 관계는 한겨울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어 있다.
생각해 보면 <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김현경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가 인쇄되던 2006년 봄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면서도 남북 간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금강산 관광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개성공단도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통일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하게 된 당시의 상황에서 저자의 글은 대화와 교류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기에 충분했다.
2007년 10·4 공동선언은 2000년 6·15 공동선언을 계승한 것으로 보다 긴밀한 남북 관계를 추진하려는 남과 북의 공적인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공적인 약속은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무시되고 폐기되기 시작했다. 이남의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 3000이나 삐라 살포 묵인 그리고 북의 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 공동 제안 등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것은 대북 적대 정책을 의미하는 것들이다. 이에 이북은 개성 관광 중단, 경의선 운행 중단, 개성공단 상주 인력 감축 등과 같은 대남 강경 정책으로 맞서고 있다. 이 엄혹한 남북의 적대 관계에서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대화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부드러운 글쓰기 그리고 문제들
▲ <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김현경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 |
책을 읽기 전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기자의 일상적인 업무였다. 주변을 살펴보면 마감 시간과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기자는 그 누구보다 바쁘고, 어떤 식으로든 특종을 만들어야 하므로 매우 힘겨운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바쁘고 힘든 기자의 일상 속에서 단행본 책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자칭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족 문제를 관념적으로 폄하하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서, 남북 관계라는 무겁고 심각한 민족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자칫 공은 많이 들어가도 성과는 별로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책은 무엇보다 가볍고 유연하며 알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이 단지 문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용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글을 술술 읽을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책은 남북 관계에 관심이 있는 일반 대중이 읽기에 적합한데, 호흡이 짧으면서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복잡하고 경직될 수도 있는 남북 관계의 민족 문제를 부드럽게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이북을 북,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현상은 그때그때 편의상 사용한 것이라고 보이는데, 이 가운데 '북한'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남에서 흔히 사용하는 '북한'이라는 말은 철저히 대한민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북에서 '남조선'이라는 말은 철저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남에서 '남조선'이란 말을 낯설게 느끼듯이 이북에서는 '북한'이라는 말을 어색하게 느낄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화와 교류를 지향한다면 분단체제의 산물인 대한민국 중심의 '북한'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심의 '남조선'이란 표현보다 통일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이북'과 '이남'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의 휴전선은 결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대화와 교류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휴전선을 걷어내고 통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통일 지향적인 '이북'과 '이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Mr. 김정일, 차 한 잔 하실까요?>에서 대화의 필요성을 전제로 다양한 내용을 흥미있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남북의 대화와 교류 그리고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인 미국과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이것이 내용상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 책이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반드시 미국과 국가보안법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남북 관계 정상화와 통일의 실현과는 별 연관이 없게 될 것이다. 남북 관계 정상화와 통일의 실현을 위해 대화의 필요성은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대화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는데, 이남과 이북, 이남과 이남, 이북과 이북, 이북과 미국, 이남과 미국 등이 그것이다. 우선 미국과의 대화 문제를 생각해 보자.
각종 대화들
미국은 이남과 이북에게 어떤 존재인가? 사실 미국은 소련과 함께 1945년 8월 북위 38도선으로 분할 점령하여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분단을 초래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 그리고 소련이 이북에서 물러간 이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이남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이북을 경제적으로 봉쇄하고 군사적으로 위협한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그래서 이북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의 침략 공포 속에 휩싸여 군사 중심의 사회가 된 것에 일차적인 책임은 미국에게 있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이북과 미국이 대화를 통해 한반도 긴장 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국제적인 환경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남에게 미국은 1980년 이전까지 대체로 우호적인 국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 5·18 민중항쟁 이후 미국이 이남의 독재자를 후원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남의 정치적 모순의 핵심에 미국이 있고, 이남의 자주적인 발전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 규명되었다. 그래서 이남의 민중이 미국의 일방적인 이익 추구를 반대하며 헌신적으로 투쟁한 것은 그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저자는 미국의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민족 모순의 문제를 소홀하게 취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남과 이북의 관계에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저자의 입장을 따른다면 '대화의 부재'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대화가 단절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나 또한 대화가 중요한 것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이남과 이북의 관계에서 반드시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남과 이북이 대화의 장에 나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동안의 남북 대화와 교류를 계승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안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자의적으로 탄압했던 국가보안법이 완전히 철폐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실제로 이남 내부의 대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
흔히 '햇볕정책'이니 '퍼주기'로 폄하했던 기존의 남북 대화와 교류를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 '햇볕정책'은 이북만이 아니라 이남까지 포함한 한반도 차원의 평화 정책이었으며, '퍼주기'는 남과 북이 평화를 위해 서로 양보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국가보안법이나 삐라 살포처럼 이북을 적대시하는 정책과 행위를 반드시 폐기해야 남북 대화와 교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화와 통일의 필요성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남북 대화와 통일은 정말 필요한가?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자, 이남 내부의 상호 대화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 또한 남과 북 사이의 대화와 통일의 필요성을 평화와 상호발전의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체제 우월적 시각을 전제하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상호발전이 되기에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체제 우월적 시각은 진정한 대화, 교류, 협력을 통한 평화와 상호발전 그리고 통일의 실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남의 심각한 경제 상황과 비정규직 노동 문제, 일자리 문제 등을 염두에 두면 남북 대화를 통해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북도 이남과의 협력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해 남북 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남 내부의 문제와 이북 내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필수적인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남북 대화를 통한 통일의 필요성은 매우 현실적인 함의가 있는 것이다.
통일의 방법과 체제
그렇다면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가? 우선 이남과 이북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남북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통일의 방법과 체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흔히 말하기 꺼려한다. 권력의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국가보안법에 걸려들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통일의 체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실제로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고 자유왕래가 된다면, 그만큼 통일을 위한 기초가 형성된다는 측면이 있기에 대화와 교류와 자유왕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궁극적으로는 통일의 방법과 체제 문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통일의 방법과 체제 문제는 결코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통일 방법과 체제의 경우 1980년 이북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통일방안(연방제)과 1989년 이남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연합제)이 있었지만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점진적인 통일 방법에 의한 통일 체제가 대표적이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6·15 공동선언문 중 일부)
저자의 경우 점진적인 통일 방법을 선호하지만, 통일의 체제 문제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저자의 글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저자는 이남과 이북의 교류를 통해 이북에 중산층이 형성되면 이북이 민주화될 것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유연한 흡수통일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나는 남과 북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흡수통일이나 무력통일의 방법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이상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통일에 관한 기존 논의가 소위 남북의 지배 계급 위주로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남과 이북의 민중 이익에 따라 통일의 방법과 체제가 결정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 민족 통일의 방법과 체제를 결정지을 때도 민중의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민중을 중심으로 통일의 체제를 생각할 때, 흡수통일이나 무력통일이 아닌 방법으로, 자본주의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가 아닌 민중의 이익이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와 이념을 바탕으로, 남북 통일을 적극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민중 중심의 통일은 현실적으로 멀고도 험한 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멀고 힘들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족의 모순과 계급의 모순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 통일의 머나먼 길을 내다볼 때, 저자의 부드러운 글이 남북 관계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작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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