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에서 <이스턴 프라미스>가 취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영화는 범죄조직에 공통적인 '신고식' 살인으로 시작한다. 조직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주로 미성년자나 젊은 청년)에게 살인을 사주하는 것이다. 이후 장면은 출산이 임박한 채 하혈을 하는 어린 소녀, 타냐로 전환된다. 소녀는 결국 아이를 낳고 죽는다. <대부>에서도 아기의 세례식과 정적 숙청 장면이 교차편집되고 있고 콜레오네 '가족'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스턴 프라미스>는 아예 영화의 중심축이 삶과 죽음의 명확한 대비이다. 이 과정에서 소가 낳은 아기, 크리스틴은 영화의 중심 키가 된다. 아기를 죽이려는 이들과 아기를 지키려는 이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묜은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니콜라이를 적의 손에 넘겨주었으면서도 크리스틴을 죽이려 든다. 아버지에 대한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던 키릴은 차마 갓난아이를 죽이지 못한다. 안나는 그녀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인다.
▲ <폭력의 역사>에 이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걸작, <이스턴 프라미스> |
많은 평자들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 <이스턴 프라미스>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전작인 <폭력의 역사>와 댓구를 이룬다. 선량한 가장이자 영웅의 얼굴을 한 킬러, 그리고 킬러의 얼굴을 한 정부 요원이자 수호자, 두 캐릭터 모두 비고 모텐슨의 복잡다단한 연기를 입고 비로소 실체화된다. <폭력의 역사>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했던 톰은 결국 과거의 자신인 '킬러 조이'와 조우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정부 요원 니콜라이는 보리파에 의해 납치된 여자와 안나의 삼촌을 구하고 안나와 크리스틴을 보호하지만 결국 그 자신은 세묜을 대신해 새로운 보스가 된다. 선과 악은 이토록 한 존재의 양면이며, 선량한 이들의 안전과 보호는 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폭력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크다. 그렇기에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크로넨버그 자신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면서도 폭력을 옹호하고 있지는 않다. 키릴은 결국 울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다. 안나는 니콜라이의 보호를 받긴 하지만, 결국 크리스틴을 구한 것은 안나의 적극적이고도 용기있는 개입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직의 보스가 된 니콜라이가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올리고 원피스 치마를 입은 안나의 표정은 행복에 차있으며 그녀의 집은 밝은 햇살로 가득하다. 안나와 니콜라이는 분명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크리스틴의 준-부모의 역할을 하지만 결국 니콜라이가 안나의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구원의 은총은 때로 폭력의 개입을 거치긴 하더라도, 결국은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자기희생의 용기에서 비롯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스턴 프라미스>에게 바쳐지는 러시아마피아 판 <대부>'라는 찬사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오히려 <이스턴 프라미스>의 가치를 깎는 결과가 된다. 두말할 필요가 없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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