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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감독들에게 레드 카펫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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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감독들에게 레드 카펫을!

[신기주의 이야기 속으로] 한국영화, 세대교체

<미인도>의 전윤수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같은 중간 감독한테도 신경을 좀 써 달라." 전윤수 감독이 말하는 중간 감독이란 칸느 영화제에 나갈 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지만 상업적으로 성실하고 관객과 호흡하는 재미있는 영화를 주로 만드는 감독을 뜻했다. 그래서 중간이었다. 스타 감독이 되기엔 평단의 열광적인 지지도 얻기 어렵고 배우들의 존경도 받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하류 감독은 아니었다. 영화에 자의식을 과도하게 투영하지 않다 뿐이지 영화를 허투루 만드는 게 아니었다. 전윤수 감독은 말했다. "난 잘 만들고 싶고 실수도 안 하는 감독이고 싶다. 인정 받는 건 사실 상관 없다." 전윤수 감독이 만든 <식객>은 300만을 넘겼다. <미인도>는 이미 200만을 넘겼다. 각각 2007년과 2008년을 대표하는 흥행작이 됐다.

전윤수 감독처럼 말하는 신인 감독이 있다. <과속 스캔들>의 강형철 감독이다. 강형철 감독은 말했다. "영화에 작가적 자의식을 투영하는 건 오만인 거 같다. 나는 직업 영화 감독이고 싶다. 영화는 관객의 것이다." 예전 같았다면 제작자들한텐 몰라도 평단한텐 분명 환영받지 못했을 얘기다. 신인 감독이 패기가 없다고 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영화는 스스로의 자의식으로 대중의 무의식과 호흡하며 성장해왔다. 한국영화 자체가 자의식 덩어리였을지도 모른다. 영화 저널은 그걸 십분 반영했다. <과속 스캔들>은 개봉 첫 주말에 60만 관객을 모았다. 27억짜리 영화가 개봉 첫 주에 60만을 넘기긴 드문 일이다. <무사>의 첫 주말 관객은 80만 명 정도였다. <과속 스캔들>은 100편의 개봉작 가운데 겨우 7편만 돈을 번 한국영화에겐 가뭄의 단비와 같다.

▲ 과속스캔들

강형철 감독과 같은 얘기를 했던 사람이 또 있다.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이었다. 나홍진 감독은 말했다. "나한테는 소통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남한테 보여지는 것인데 나를 위해서 영화를 만들 거라면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는 덧붙였다. "나도 내 걸 표현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한다. 하지만 난 특별히 영화를 많이 본 사람도 아니고 내 인생의 영화 같은 것도 없는 사람이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영화란 재미있고 관객과 호흡하는 영화일 뿐이다. 난 처음엔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어쩌다 영화를 했고 영상을 좀 만질 줄 알게 돼서 여기까지 왔다." <추격자>는 올해 최고의 작품이다. 영화상을 휩쓸어서가 아니다. 한국영화가 아직 대중과 소통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건 <추격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은 한 달도 안 되는 후반 작업 기간 동안 허겁지겁 편집을 끝내야 했다. 그런데도 <추격자>는 500만을 넘겼다.

2008년의 혹한에서 살아남은 영화들한텐 공통점이 있다. 지극히 장르적이고 지극히 관습적이며 지극히 뻔하고 지극히 통속적이며 지극히 얄팍하단 점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만큼 통속적인 영화는 없다. <추격자>만큼 장르에 짜맞춘 듯 충실한 영화도 없다. <미인도>는 남장여자라는 신윤복의 섹슈얼리티를 가장 얄팍하게 확대했다. <과속 스캔들>은 가족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는 관습적인 이야기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발견 따윈 이 안엔 없다. 한국영화는 세계 무대에서 존경 받아왔다. 영화의 새로운 미학적 성취를 이뤘다고 했다. 깐느와 베를린과 베니스에서 주목 받았다. 2008년의 한국영화엔 그런 것 따윈 없다. 하지만 더 큰 공통점이 있다. 감독들에겐 과도한 자의식 따윈 없다. 어떤 감독이든 장르를 다룰 때 그 문법을 비꼬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게 감독의 자의식이다. 상업적인 흥행 공식에 자신만의 지문을 남기고 싶어한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면 병이 든다. 예전 세대의 감독들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본과 제작자와 대결 구도를 이뤘다. 뻔한 영화를 만들라는 자본에 맞서 감독은 자의식으로 승부했다. 그것이 한국영화 진화의 추동력이었다. 이제 한국영화는 다른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강형철 감독과 나홍진 감독이 한 목소리로 했던 말이 있다. "내겐 재능이 없다. 재능 있는 감독은 따로 있는 거 같다. 난 그냥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뿐이다." 틀린 말이다. 그들에겐 뛰어난 재능이 있다. 그들은 영화로 자기 인생을 증명하거나 세상을 바꾸려 하거나 자신의 재능을 시험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가볍게 하늘하늘 관객과 호흡한다. 이제까지 한국영화엔 없었던 뛰어난 재능들이다.

▲ 추격자

어쩌면 세대 교체의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한국영화는 지금 위기다. 위기는 춥고 배고픈 시기다. 하지만 그 시기의 좋은 점이 있다면 스스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데 있다. 전윤수 감독이 말했던 중간 감독의 시대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객은 오래 전에 변했다. 더 이상 영화로 집단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개인의 취향에 골몰하는 세대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자의식으로 집단의 무의식과 소통하고자 했다. 예전엔 가능했다. 대중이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관객은 개인이다. 개인의 묶음과 상대하자면 영화는 훨씬 더 얄팍해져야 한다. 통속적이고 관습적이어야 한다. 장르의 약속으로 관객을 옭아매야 한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장르적 약속을 맺기 전에 장르 파괴부터 시작했다. 장르의 약속을 평범하게 따르는 중간 감독을 늘 변두리로 몰았다.

돌이켜보면 중간 감독들이야 말로 언제나 한국영화의 구원자였다. 관객들은 언제나 뻔한 약속을 기다렸다. 2001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같은 SF블록버스터들의 대폭락으로 휘청했을 때도 한국영화를 지탱해준 건 싸구려 조폭 코미디들이었다. <조폭 마누라>를 만든 조진규 감독은 이렇게 자조했었다. "나도 인정 받고 싶긴 하다. 그러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그냥 우리 집 거실에 레드 카펫을 깔아놓고 왔다 갔다 한다." 미학적 자의식과 대중적 친화력은 모든 예술이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양쪽 가치다. 어느 한쪽이 옳거나 그르진 않다. 시대의 요구와 내적 까닭으로 한 쪽으로 흘러가곤 할 뿐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시계추는 분명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제 중간 감독에게 진짜 레드 카펫을 깔아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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