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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없었다면 20세기 과학은 없었다"

[화제의 책] <야누스의 과학>

우리 일상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과학기술, 만약 양차에 걸친 세계대전과 그 뒤를 이은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없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모습일까? 최근 나온 <야누스의 과학>(김명진 지음, 사계절 펴냄)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컴퓨터, 인터넷, 우주과학, 지구과학 등 과학기술의 상당수가 전쟁의 그늘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핵폭탄의 적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원자력 맹신자' 외에는 없다. 1960년대 전 세계를 들뜨게 했던 구호 '플라이 투 더 문(Fly to the moon)'이 미소 간의 냉전의 변주였음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인터넷은 물론이고 지구과학도 전쟁의 산물이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이들이 많을 듯하다. 이 책이 말하는 진실은 이렇다.

전쟁의 그늘에서 성장한 20세기 과학기술

▲ <야누스의 과학>(김명진 지음, 사계절 펴냄) ⓒ프레시안
널리 알려진 대로 1960년대는 미소 간 핵전쟁의 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다. 1960년대 초 국방부의 지원을 받는 싱크탱크 '랜드코포레이션'의 폴 배런은 소련과의 핵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전체 네트워크가 다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분산 네트워크'를 제시했다.

바로 이 배런의 연구를 받아들여 미국 국방부 소속의 연구기관 '아르파(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ARPA)'는 곳곳에 흩어진 컴퓨터를 연결하는 일명 '아르파넷(ARPANET)'이라고 불린 분산 네트워크를 고안했다. 바로 이 아르파넷이 오늘날 인터넷의 초기 형태다.

지구과학 역시 마찬가지다. 1950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 지구과학자 대부분이 받아들이는 '판구조론'의 효시라고 할 만한 '대륙 이동설'의 지지자는 소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20년간 대륙이동설 더 나아가 판구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런 발견이 쏟아진 중요한 계기는 바로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잠수함 작전에 필요한 각종 해양 측정 장비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해양 탐사 지원을 이끌어냈다. 군대는 지구과학자의 해저 탐사를 아낌없이 지원했고, 지구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성과 일부가 군사 기밀로 분류돼 논문으로 발표할 수 없는 상황을 감수하고 이런 밀월관계를 이어갔다.

이 밀월관계를 상징하는 지구과학자가 바로 해리 헤스다. 그는 '해저확장설'을 제시해 판구조론의 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과학자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해군 대령으로 활동하면서 연구 결과를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를 지내면서도 군복을 벗지 않았다.

'PC 혁명'…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야누스의 과학>은 이렇게 전쟁의 그늘에서 성장한 과학기술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갖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오늘날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경수로'가 다른 기술('중수로', '기체흑연로' 등)을 제치고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과정을 설명한 대목이 그렇다.

1949년 소련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핵을 둘러싼 미소 간의 경쟁이 본격화한다. 원자로를 어느 쪽이 먼저 개발하느냐는 자칫하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서 원자로를 개발해 국제시장을 선점한다면 이는 미국에 엄청난 타격으로 작용할 터였다."

소련보다 먼저 전력 생산용 원자로를 개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은 다급하게 "경제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된 항공모함용 경수로"를 원자력 발전소에 도입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자력 발전소는 전력을 판매하는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였음에도 전력 생산 단가가 화력 발전소의 10배에 달할 정도로 터무니없이 비쌌다.

미국이 이렇게 급하게 개발된 경수로를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면서 원자력 발전소의 표준이 마련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수한 기술'이 경쟁 속에서 '열등한 기술'을 퇴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실제로 "당시 서로 경쟁하던 기술 중 어느 것이 안전성, 경제성 면에서 가장 우수한 것이었는가에 관한 논쟁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과학기술 역사에서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다른 예도 있다. 오늘날과 달리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의 주류는 대형 컴퓨터였다. 1970년대 중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기반을 둔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했지만, 이런 소형 컴퓨터를 "써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컴퓨터라고 부를 수도 없어 보이는" 기계에 사람은 열광했고, 몇 년 안 돼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만개했다. 이 책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에서 찾고 있다. "1970년대 들어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한 배경에는 컴퓨터 애호가들의 독특한 취미 문화와 'IBM의 힘을 민중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컴퓨터 해방 운동가들의 저항 문화가 있었다."

이 책은 과학기술 시대를 상징하는 컴퓨터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처럼 개인용 컴퓨터가 왜 1970년대 중반에 나와서 초기의 조악한 수준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질 수 있었는지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필 것을 주문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컴퓨터의 크기는 작아졌고 연산 속도는 빨라졌다는" 식의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세 가지 열쇳말

<야누스의 과학>은 20세기 과학기술의 명암을 다루면서 21세기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몇 가지 열쇳말도 제시한다. 첫 번째 열쇳말은 '불확실성'.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합성살충제, 환경호르몬 등 과학기술이 낳은 위험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는 곧바로 '불확실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치명적'일 수 있는 '불확실한 위험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두 번째 열쇳말은 '상업화'. 갈수록 기업이 과학기술 활동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이제 21세기 과학기술은 총 대신 돈의 노예가 되었다. 1970년대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생명공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더 늦기 전에 돈의 힘으로부터 과학기술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갈 인류가 풀어야할 중요한 과제다.

세 번째 열쇳말은 '참여'. 이 책은 과학기술 시대의 밝은 미래를 만들 힘의 원천을 시민의 '참여'에서 찾는다. 21세기 과학기술 역사는 바로 시민의 힘으로 20세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미래는 저절로 장밋빛으로 변하거나 필연적으로 암울한 모습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여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 발전의 궤적을 정해진 것으로 치부하거나 기성 이해집단의 힘에 굴복하지 말고 과학기술 개발의 모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요구된다."

'20세기 과학기술의 사회사'라는 부제를 단 <야누스의 과학>은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다. 대중을 상대로 쓴 20세기 과학기술사를 소개하는 변변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당분간 이 분야의 필독서가 될 듯하다.

20세기 과학기술사의 여러 가지 쟁점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사진도 책 읽는 즐거움을 배가한다. 예를 들어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합성살충제 논란을 설명하는 8장에 실린 몇 장의 만평을 보면,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살충제를 바라보는 대중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겨울방학 때 학생에게 권할 책의 목록을 만들려는 교수, 교사들은 이 책을 1순위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20세기 과학기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피는 <20세기 과학의 쟁점>(임경순 지음, 민음사 펴냄)을 함께 읽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5년 발행된 이 책은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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