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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 스캔들, 정속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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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 스캔들, 정속 스캔들

[신기주의 이야기 속으로] 영화 <과속 스캔들> 속의 정속 스캔들

<과속 스캔들>은 어쩌면 제목이 비호감이다. 자동차 경주 영화 같다. 그러나 과속도 금물이요 속단도 금물이다. <과속 스캔들>은 어느날 갑자기 아빠를 찾아온 딸과 같은 영화다. 기른 적도 없는데 잘 커서 찾아왔다.

여섯 살 꼬맹이 기동(왕석현)은 상처 받고 말았다. 놀이방에서 만난 여자 아이가 눈길도 주지 않아서다. 기동은 미혼모 엄마(박보영)와 막 상경한 참이다. 도회지 여자 아이가 촌스런 시골뜨기 기동을 좋아할 리가 없다. 기동은 놀이방 미끄럼틀에 기댄 채 자기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쪽 다리를 올리고 앉은 자세가 영락없이 고독한 한 마리 늑대다.

객석에선 영락없이 웃음이 터진다. 이미 기동 때문에 여러 번 웃은 참이다. 웃음보 영화는 흐름이 중요하다. 일단 웃음이 터지면 별 것 아닌 장면에서도 키득거리게 된다. <과속 스캔들>이 그랬다. 관객들은 연신 키득거렸다. <과속 스캔들>의 강형철 감독은 말했다. "그 장면은 공짜로 주웠다. 촬영장에서 아이가 자다 일어났는데 그렇게 어른처럼 앉아있는 거다. 가만 보면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어른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난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써먹었을 뿐이다." 황정민처럼 밥상에 숟가락 하나 놓았다는 식의 얘기다. 하지만 다 된 밥을 줘도 못 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술 더 떠서 강형철 감독은 차려준 밥을 잘 비벼서 더 맛있게 만들었다. 놓치는 법이 없다. 쏙쏙 빼먹는다. 애기 배우의 우연한 행동을 놓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라디오DJ인 차태현은 생부를 찾아가겠다며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가 사실은 자기 딸인 줄 모른다. 아빠를 아는 딸과 딸을 모르는 아빠의 라디오 대화는 주거니 받거니 미묘한 말장난이 된다. 강형철 감독은 이런 복선을 잘 쓴다. 차태현은 기동을 이용해서 예쁜 유치원 선생을 꼬셔보려고 한다. 기동은 유치원 선생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캐내서 차태현한테 알려준다. 알고 보면 유치원 선생이 일부러 흘린 것들이다. 보는 이는 키득거리게 된다. 감독도 관객도 즐겁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첩시켜서 지켜보는 게 지루하지 않다.

▲ 과속 스캔들

박중훈은 꼭 함께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로 차태현을 꼽은 적이 있다. <투 가이즈>에선 결국 함께 했었다. 박중훈처럼 차태현 역시 유연한 코미디 감각을 지닌 배우다. 그러나 코미디 배우는 웃음을 소진하면 식상해진다. 박중훈이 그랬듯이 차태현도 그랬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줄곧 죽을 쒔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나 <해피에로 크리스마스>에서 차태현은 동어반복을 했다. <파랑주의보>와 <바보>에선 아예 착한 차태현이 됐다. 차태현이 변한 게 아니었다. 관객이 변한 거였다. 그런데 <과속스캔들>에선 차태현이 다르다. 놓치는 법이 없고 쏙쏙 빼먹는 감독 덕분이다.

강형철 감독은 차태현에게 웃기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다른 영화에서 차태현은 웃기려고 기를 썼다. 웃음은 모두 차태현의 몫이었다. <과속 스캔들>에서 차태현은 거들 뿐이다. 웃음은 엄마 황정남을 연기한 박보영과 손자 기동을 연기한 애기 배우 왕석현과 차태현의 친구로 나오는 성지루와 라디오 국장으로 나오는 정원중이 적절하게 나눠 갖는다. 그래서 <과속 스캔들>의 웃음은 과하지 않다. 누구 하나 내가 웃겨야 한다고 나서지 않는다. 할 만큼만 한다. 박보영은 퉁명스럽게 웃기고 애기 왕석현은 멀뚱하게 웃긴다. 차태현은 그 안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갈 뿐이다. 강형철 감독은 말했다. "<과속 스캔들>은 농담 같은 영화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크게 웃기 보단 키득키득 거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은 두 시간 내내 키득거린다.

<과속스캔들>은 빤한 영화다. 처음엔 황당하고 중간엔 웃기고 끝에 가선 슬프고 마지막에 가선 따뜻하다. 바람둥이 라디오 DJ가 중학생 시절 실수로 낳았던 딸을 뒤늦게 만난다. 그 딸 역시 미혼모라 라디오 DJ는 졸지에 할아버지가 된다. 처음엔 서로 미워하지만 결국 가족을 이룬다. <어바웃 어 보이>나 <러브 액츄얼리>가 연상된다. 빤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빤한 영화를 잘 만드는 재주가 한국영화엔 없었다. 한국영화는 늘 장르를 꼬고 베고 나누기 바빴다. 관객들은 빤한 영화를 원하는데 변종을 조제해줬다. 강형철 감독도 <어바웃 어 보이>나 <러브 액츄얼리>를 봤다. 그만 본 게 아니다. 관객들은 간질간질한 영국식 코미디에 환호했다. 많이들 그런 영화를 너무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빤한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어려웠다. 차라리 괴수가 하늘을 날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게 더 쉬웠다. 인물과 대사와 관계만으로 관객과 호흡한다는 건 공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과속하지 않는 공력 말이다. 모두가 워킹타이틀의 형식만 흉내 내다 말았다. <과속스캔들>은 보기엔 빤한 영화지만 만들긴 어려운 영화다. 영리한 감독이 욕심을 버리고 기본을 지켜서 가능했다. 영화에선 어느 누구도 극악을 떨지 않는다. 한국 코미디들은 언제나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금새 장르의 생명력을 소진해버렸다. <과속 스캔들>은 과속하지 않는다. 농담 같은, 정속 스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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