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암울한 것은 지금이 고통의 터널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금융위기, 유가 폭등 등 국제적 환경의 악화를 근거로 들고, 비단 위기가 우리 사회 뿐 아니라 그야말로 글로벌한 위기라 친다손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라며 10년 동안의 소위 '민주개혁정권'을 내치고, '경제CEO'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결과치고는 참혹한 현실을 앞에 두고 국민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하지만 그 하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 지는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사람은 이대로 가면 '정권과 체제의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감을 토로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실천엔 위기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아니 '위기'를 기회로 '촛불의 힘'에 밀려 있던 각종 시책을 밀어붙일 태세이다. '4대강 정비면 어떻고, 운하면 어떠냐.'라면서 불황타개를 빌미로 기꺼이 전 국토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작태마저 불사하겠다고 전운을 불태운다.
'왼쪽으로 치우친 것을 가운데로 갖다 놓아라.'라는 말을 실천하느라 학생들이 보는 교과서를 자신의 '색깔'로 분칠하려고 윽박지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헌법재판소는 '1% 가진 자'의 손을 들어주다가 스스로 금지옥엽처럼 아끼고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가족 공동체 수호'라는 보수적 가치를 내던지고 '개인별 합산'이라는 리버럴한 가치를 옹호하는 모순적인 결정도 스스럼없이 내리고 말았다.
집권세력의 '듣보잡'스런 정책
▲ 서울 남구로역 인근 거리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성이고 있다. ⓒ뉴시스 |
그러고도 물가가 비싼 서울지역의 최저임금을 올릴 생각은 절대 안한다. 저소득층과 장애인에게 국가가 주는 혜택이라던 LPG사용은 정부의 무분별한 자율화 정책과 기업의 이윤에 눈이 먼 행태로 어느새 휘발유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이 와중에 청와대 대통령 부속실은 500만 원에 달하는 야외용 파라솔, 한 대에 150만 원이나 하는 헬스사이클, 취임 초기에 로그인을 못한 불편감을 해소하려 했던지 한 대에 천만 원이나 하는 노트북을 구입했다고 한다.
손소독기, 쌀 씻는 기계 등 돈 없는 서민들은 구경조차 못하는 물품도 구입하는 센스까지 갖추었다고 하니, 도무지 신뢰할 데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형국이다.
여기에다가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 종합부동산세 등의 감세를 통해 2%부자들에게 무려 80조 원에 달하는 이득을 통째로 가져다주고, 기초생활보장, 장애인수당, 아동양육비, 노인돌보미 등 빈곤층과 저소득층에게 돌아가는 예산을 삭감한 '2009년도 예산안'은 못 고치겠다며, 오히려 빨리 예산을 집행해야 하니 국회에서 빨리 통과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사회복지예산은 삭감하고 있으면서 동절기에 빈곤층 지원 대책을 긴급히 마련하고, 경제위기 저소득층 대책마련을 최우선적으로 수립하겠다고 하면서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온갖 설레발을 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정권과 체제의 위기'를 체감한 대책이 세워지고 있긴 하다. 총리공관 관리비용이 올해보다 5배 늘었고, '준법시위 정착 예산', '법질서 바로세우기 예산'이란 허울 좋은 이름의 예산이 대폭 늘었다.
뿐만 아니라 공안수사 예산, '바람직한 인터넷 이용환경 조성'이란 아름다운(?) 명칭의 인터넷 감시 예산도 새로 책정했다. 교육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시하는 일제고사 시험결과를 분석하는 예산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먹고사는 문제'와 떼놓을 수 없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추위를 가장 먼저 느끼는 이들은 없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추울수록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더 느낄 수 있다고 누군가는 말하기도 했다.
경제가 위기이다. 이 위기를 제일 먼저 느끼고, 어려움에 처하는 이들은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가 가져가는 몫이 줄어들 뿐이다. 줄어드는 몫을 만회하려고 없는 이들의 '간'마저 내놓으라고 한다. 아니 영혼마저 길들이는 시도를 할 것이다.
제일 먼저 임시직, 일용직 노동자들이 노동할 권리를 박탈당해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있다. 영세자영업자들은 가게를 내놓고 거리로 내몰린다. 거리의 노점은 거리의 '아름다움'을 위해 없어져야 할 존재이다. 거리의 아름다움을 위해 이들의 '먹고 살 권리'는 연말이면 관습처럼 파헤쳐지는 아스팔트처럼 내팽개쳐질 따름이다.
경제를 살린답시고, 일자리를 만든답시고 국토가 파헤쳐진다. 국토가 파헤쳐지는 것은 비단 자연의 생명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종국에는 자연의 생명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일이다. 영혼을 길들인답시고 학생들을 줄 세우기 바쁘고, 거짓을 주입시키면서 학생들의 자율적인 교육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경제를 살리자'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오히려 먹고 사는 권리, 노동권, 생명권, 교육권 등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말은 이 땅 대다수 빈곤층에겐 거리가 멀거나,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라는 궤변이 일순간 통했듯이, 먹고사는 문제와는 무관하듯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인민에게 평화가 곧 밥이었듯이, 미군에 의한 전쟁의 참화에 고통 받는 이라크 여성과 어린이에게는 평화가 곧 밥이듯이, '백년 만에 처음 겪는 위기'라고 어느 경제학자가 얘기했듯 경제위기라는 긴 터널의 입구에 선 지금 이 땅에선 민주주의와 인권이 밥이다.
아니 민주주의와 인권은 곧 '밥', '먹고 사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할 지 모른다.
(이 글은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 "인권과 밥"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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