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그랬다. 4월 재보선 출마 여부를 묻는 '전북도민일보' 기자에게 "지금 상황에서 출마에 대한 뜻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하면서도 여운을 남겼단다. "때가 되면 참모들과 의견을 나눌 생각이며 무엇보다 지역 내 어른들과도 상의할 것"이라고 말했단다.
주목하자. "지역 내 어른들과 상의할 것"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그 지역이 어디일까? 전주 덕진이다. 민주당 김세웅 의원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2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벌금 500만원을 받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는 순간 무주공산이 되는 곳이다. 18대 총선 전까지 정동영 전 의장의 텃밭이었던 곳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다. 정동영 전 의장이 출마를 결심하는 순간 금배지는 따 논 당상이 된다.
너무 쉽다. 너무 안이하다. 정동영 전 의장이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나던 그 때의 영상에 대비하면 지켜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너무 게으르다.
명색이 대선 후보였던 그다. 4.9총선에서 민주당의 부활에 헌신하겠다며 정치적 연고가 없는 지역(서울 동작)에 출마했던 그다. 1년 전의 위상과 반 년 전의 다짐에 견줘보면 정동영 전 의장의 전주 덕진 출마는 기회주의 행태에 가깝다. 제 한 몸 편하자고 꽃가마 타려는 행태와 같다.
자신의 깜냥을 평의원 정도로 스스로 격하시키고자 한다면 굳이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정치에 입문한 이래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던 그의 이력을 잘 알기에 '조명발' 향수병이 있으리라 짐작도 한다.
하지만 토를 안 달 수가 없다. 그가 재보선에 출마하면, 그가 원내에 진입하면 일개 평의원으로 머물 것이 아니기에 토를 달지 않을 수가 없다.
민주당의 최대 고민은 '스타'가 없다는 것이다. 당 지지율이 요지부동인 상태에서 '스타'조차 보유하지 못해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게 최대 문제다. 이런 민주당에 정동영은 유혹거리다. 민주당의 어느 누구보다 지명도가 앞서는 그 아닌가.
조건이 갖춰질 수 있다. 4월 재보선에서 행여 민주당이 패배하면 정세균 체제가 흔들린다. 가뜩이나 정체성 없는 지도부라고 욕을 먹는데 여기에 '이명박 실정'의 반사이익조차 수확하지 못하면 정세균 체제는 순식간에 붕괴될 수 있다.
전주 덕진에서 재기한 정동영 전 의장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당을 접수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 정동영계로 분류됐던 의원 상당수가 아직 당내에 포진해 있으니 세를 규합해 당 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다.
그 뿐인가. 재보선 후에 당을 거머쥐면 2010년 지방선거에서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당내 세력기반을 넓히고 나아가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바로 이게 문제다. 이런 뻔한 행로를 정동영의 경쟁자들이 모를 리 없다. 손학규·김근태 같은 인물들이 두 눈 멀건이 뜨고 정동영 전 의장이 민주당을 접수하는 걸 지켜볼 리 만무하다. 대응하지 않을 수 없고, 재보선 출마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되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흐르면 민주당의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물어볼 필요가 없다. 복고정당이 된다. 한 물 간 옛스타들이 떼로 나와 흘러간 노래를 부르는 그 겨울의 찻집이 되기 십상이다.
지지할 리 만무다. 국민이 이런 민주당을 지지할 리 없다. 이미 심판은 끝났다. 그런 민주당에 대한 심판은 지난 대선과 총선을 통해 가혹하게 내려졌다. 굳이 또 한 번 심판하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부관참시가 될 공산이 크다.
정동영 전 의장이 '때'를 강조했으니 되받자.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정동영 전 의장이 나설 때가 아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때'가 자연히 도래할 가능성도 없다. 김대중·노무현의 우산 밑에서 감초 역할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던 과거의 행적과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갈고 닦지 않는 한, 유창한 언변을 무기 삼아 지명도에 안주하는 행태를 버리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때'는 오지 않는다.
정동영 전 의장이 진정 살고자 한다면 죽고자 해야 한다. 지명도를 버리고 안식처를 접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 정동영'에 배어 있는 시퍼런 멍자국을 지울 수 있다.
정동영 전 의장이 살고자 하기에, 죽는 길로 가고자 하기에 던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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