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
무엇으로 철학을 하나?
오래된 우화가 있다. 제자에게 약초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던 선생이 하루는 제자보고 산에 가서 약초를 캐오라고 한다. 지엄한 스승의 명을 받들어 제자는 몇날 며칠을 온 산과 들을 헤매면서 약초를 고르고 골라 한 바구니를 의기양양하게 캐온다. 그걸 본 스승, 무어라고 했을까?
스승은 말없이 다시 캐오라고 내몬다. 낙심한 제자는 더 열심히 산과 들을 헤매면서 더 많은 약초를 캔다. 이번에는 한 가마니를 캐들고 온다. 그걸 본 스승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내몬다. 어쩌라고? 더 기가 죽은 제자는 골똘히 생각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약초를 보는 내 눈이 문제인가? 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면서 더 열심히 산과 들을 헤맨다.
한참을 그렇게 고생하면서 산과 들을 헤매던 제자는 그런데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걸 본 스승은 왜 빈손이냐고 묻는다. 제자 답변하기를, 온 산과 들에 약초가 널려 있어서 따로 캐올 수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스승은 이제야 비로소 미소를 지으면서 약초를 보는 제자의 눈을 인정한다.
철학도 이와 같지 않은가? 철학의 소재나 문제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문제의식이 없었고, 그것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걸러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한 채 그저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에서만 철학을 찾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철학은 소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비밀스런 코드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철학을 하지?
▲ <통합적으로 철학하기>(전3권, 유헌식 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프레시안 |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삶으로서의 텍스트에는 반드시 책, 그것도 전문적인 철학책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개방된 텍스트에는 다양한 형태의 볼거리, 읽을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삶 자체가 철학하기의 좋고 풍부한 소재가 된다. 텍스트를 이렇게 개방해 놓으면 이러한 텍스트는 반드시 우리가 따르고 배워야 하는 기성 형태의 이론이나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철학하기는 이 텍스트를 읽고, 따져 묻고, 서로 간에 이야기를 통해 대개는 감추어져 있거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작업이다. 철학하기를'텍스트에 감추어진 의미구조'를 밝히고 해석하고 또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활동으로 보아서인지 이 책의 공동 저자들이 운영하는 연구소도 '텍스트해석연구소'이다. 결국 이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철학하기'란 읽기, 말하기, 쓰기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라고 부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이 책은 먼저 읽고 생각할 텍스트를 제시한다. 앞서 말했든 여기 제시된 텍스트는 통상적 의미의 철학적 텍스트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텍스트들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읽고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창의적인 철학의 일환이고 사유의 실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교과서적 의미의 철학책들만 들먹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음으로 텍스트를 읽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낯선 텍스트를 처음 접하고서 그로부터 핵심 문제나 감추어진 의미 구조를 밝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지도나 안내자가 필요하듯 어느 정도는 탐구 방식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러한 읽기의 길잡이로서 질문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중심 질문과 보조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올바른 질문은 올바른 답변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리라.
세 번째로 이 책은 텍스트를 해석하고 감추어진 의미 구조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은 태생부터 비밀스런 독백과는 거리가 멀다.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보여주듯,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이해가 짧았던 것,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과신했던 것 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협소한 앎이 깨지는 경험도 하고, 새로운 앎을 깨닫는 놀라운 경험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화는 앎에 대한 열린 태도를 요구하고,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유아론의 한계를 일깨워 준다. 대화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늘 강조하는 상호주관성이나 집단 지성의 전범이 될 수 있으므로, 이 대화는 철학하기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성이 강한 여러 등장인물 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텍스트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석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읽고 생각하고 이야기했던 것을 글쓰기의 형태로 일반화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글은 생각이나 말이 방만해지는 것을 막고 좀 더 정확해질 것을 요구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텍스트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하거나 이론적 일반화까지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이 책은 삶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어떻게 철학을 하고 있는가?
고독과 더불어 철학하기
'통합적으로 철학하기'는 시리즈 형태로 진행되어, 1편은 고독, 2편은 성장, 3편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들은 인간이 홀로 태어나서 살아가다가 결국은 죽는다는 점에 착안해서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각기 별개로 읽는다 해도 무리는 없다.
어쨌든 고독이나 성장, 그리고 죽음 등의 주제는 인간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 상황을 통해 우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고통스러워하고 그것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 고민을 이야기 나누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면서 자신의 내면도 들여다보게 되된다.
첫 번째 시리즈로 나온 '고독'편은 1장, 고독 깨닫기, 2장, 고독 마주하기, 3장, 고독 드러내기, 4장, 고독 이기기, 5장 고독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실존 문제인 고독을 깨닫게 되고, 두렵지만 그것을 대면하면서 마침내 그 고독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승화시켜 내면의 힘을 일깨우고 창조적인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각장은 고독과 관련된 소설, 영화 등의 텍스트를 제시해서 그것을 읽고, 이야기하고, 쓰는 형태로 구성된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이 중의 한 장을 선택해서 '통합적으로 철학하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와 그로부터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2장의 '고독 마주하기'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의 20세기 버전이라 할 미셀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일부를 발췌해 텍스트로 삼고 있다. 발췌 부분은 무인도의 굴속에서 생활하는 초기 로빈슨의 모습과 나중에 이웃 섬의 원주민을 노예로 삼은 방드르디가 화약을 잘못 건드려 로빈슨의 질서 체계를 전복시킨 후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해석을 요구하는 상징과 은유가 많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동굴 속의 축축한 통로들을 묘사하는 저 그림자들, 구멍들. 그것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고독했던 운명에 대해 보상을 꿈꾸는 것, 그 동굴에 대해 어렴풋한 구역질과 더불어 관능을 느끼는 행위, 무인도에 자신이 이식해 놓은 문명적 질서를 쥐로부터 보호하는 일, 쥐의 증오에 찬 눈, 원주민 노예 로빈슨의 실수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때 그것을 은근히 바랬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 혹은 방드르디가 자신을 다른 것 쪽으로 이끌어간다는 것, 폭발로 인해 전복된 스페란차의 수호신인 거대한 삼나무의 뿌리 등…. 사실 이러한 일련의 은유와 상징들을 '고독'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일관되게 사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읽기를 보자. 해석자는 텍스트가 갖고 있는 현란한 미로를 수동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주제와 관련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자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석자의 눈은 쉽게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낯선 것들의 접촉점'을 하나의 인과관계나 의미 지평 안에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는 런던에서 무인도(스페란차)로 이어지는 '장소의 이동'과 그에 따른 의미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럴 때 문명세계에서 느끼는 고독과 무인도에서 경험하는 고독의 절대 차이가 다가온다. 또한 이 해석자의 눈은 텍스트 안에서 종종 비일상적으로 현출하는 '표현'에 주목한다. 화약의 '폭발'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다른 것'으로의 인도가 그러한 표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눈이다. 눈이 있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해석자의 눈은 이미 마련된 것인가, 자연스럽게 습득이 되는 것인가? 철학의 길에 들어서려는 초심자에게는 후자의 경우가 보다 친절할 텐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나 혹은 참조가 없어 아쉽다.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다양한 관점과 시각을 가진 여러 화자들의 대화를 통해 마련하려는 듯하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고독의 '크기'나 '성격'의 차이, 도시의 고독이나 무인도의 고독의 차이가 일깨워진다. 스페란차의 동굴과 관련한 자궁의 은유, 그로 인한 관능과 구역질에 대한 생각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오게 된다. 적의에 찬 쥐 눈이라는 은유란 실상 문명질서의 보호막이 거두어진 생생한 자연 체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사실 이렇게 다른 생각들을 가진 이들의 대화야 말로 생각의 지평을 넓이고 눈높이를 키워줌으로써, 특별히 이론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로도 철학적 사유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들도 이 대화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는 말을 한다. 물론 특정 문제들을 주제화할 수 있는 대화의 지평이나 높이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고독이라는 주제를 통해 지금까지 읽고, 해석하고 이야기를 나눈 이야기들을 가지고 어떻게 쓸 것인가? 글은 스페란차라는 '전적인 낯섬'과 같은 고독의 파괴력 앞에서 느끼는 양가적 감정을 '끌림'과 '밀어냄'이라는 개념을 통해 일반화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이미 '관능'과 '구역질'이라는 표현 속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고독'의 체험은 '강한 술'과도 같아서 그리로 향하고자 하는 몸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몸 사이의 갈등, 불안과 불균형의 혼돈, 경계 의식으로 흔들리는 동적인 체험이다. 사실상 두렵고 떨리는 이러한 긴장과 대면하는 과정에는 고통이 수반되고, 오래된 익숙한 것이 뿌리 채 전복되는 경험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두렵고 아픈 만큼 그것을 견뎌낸 정신의 크기와 깊이도 성장할 것인데, 그만큼 고독을 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글쓰기의 결론으로 유도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불안'이나 '죽음'과 같은 근본 정조를 통해 철학을 하는 것만큼 저자들은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고독의 감정을 텍스트의 읽기-말하기-쓰기의 형태로 묶음으로써 통합적 철학함의 묘미를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동사적 의미의 액션(행동)으로 간주한다. 많은 이들이 철학을 사유의 실험이고, 관념의 모험으로 생각하면서도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은 우선은 그리고 대개는 화석화된 이론을 기계적으로 습득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상상력의 마비이고, 사유의 빈곤이며, 대화의 부재로 이어져 유아론적 독백이 되기 십상이다. 이론은 거들먹거리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 무지하고, 책 속의 지혜가 삶의 지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통합하기>는 이 완고하고 폐쇄적인 관행에 신선한 충격이 될뿐더러, 새로운 실험적 철학하기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 작품을 내기 위해 한 팀을 만들어서 수년 동안 정기적으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이론 수입에 앞장서는 마당에서 자기 브랜드로 생산하려는 이들의 자생적인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입시철이면 논술을 둘러싸고 수백만 원의 고액 과외를 불사하는 이 미친 현실에서 가히 이 책은 빈자(貧者)의 등불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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