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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 의원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화제의 책]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1.

▲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이광일 지음, 메이데이 펴냄) ⓒ프레시안
짧지 않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고도 선명하게 부각되는 피사체의 음영들이 노동정치사라는 흔적을 매개로 조용히 다가올 때면 뜨거운 그 무엇이 목젖을 타고 치솟는 것을 느낀다. 거기 상이한 빛깔을 연출하는, 하나씩 차곡차곡 배열된 기념 사진의 형체들 속에는 삶에 영혼을 빼앗긴 것보다 더한 아픔과 절망, 반성이 짙게 배어 있다.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한국 급진노동운동의 형성과 궤적>(이광일 지음, 메이데이 펴냄)은 30년 전엔 '불순과 사회악의 상징'으로 정치적,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좌파, 급진운동의 역사와 이론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수십 년 세월의 흔적이 흐른 지금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라는 책 제목은 필자에게 단순한 추억이 아닌 운동적 삶의 영혼을 불러내는 것 같은 짜릿함과 긴장을 준다.

불꽃같은 세월이었던 80년대. 비장함 속에 감추어진 결의들이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좌파의 노동정치는 단지 역사 속의 조형물이 아니라 지금 강하게 반사되어야 할 대상이요, 새로운 길을 닦기 위한 확고한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 짧지 않은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 급진운동의 성과, 좌절과 반성을 넘어 그 논쟁의 역사적 의미와 본질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여 좌파운동의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희망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시선을 80년대에 집착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필자도 동의하는 것이지만 저자는 지금 진보정치, 좌파정치를 둘러싸고 논의되고 있는 쟁점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80년대 이후 형성된 급진운동과 그 이론적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개인, 집단적인 희망과 좌절, 상처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트라우마'가 되어 급진정치의 이론과 실천의 행보를 규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80년대는 단지 '질풍노도의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80년대에 나타난 현상 그 자체만을 주시하는 게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그 시기를 조망하고 장기적 전망을 염두에 두면서 60년대를 출발하여 9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에 전개된 노동정치의 역사, 이론을 검토한다.

저자는 치열했던 급진운동이 자본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고민과 함께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을 부여안고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현실 속에 반영하고자 거친 몸짓으로 역사발전의 합법칙성 위에서 전술과 전략을 고민했던 흔적들을 하나씩 더듬는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밑바닥에는 80년대라는 단순한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아울러 급진좌파운동의 꿈을 현실로 앞당기는데 대한 고민의 흔적이 녹아 있다.

2.

그 역사의 여러 모습들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우선 교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의사국가기구화된 한국노총의 반동적, 반노동자적 행태 속에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처절한 싸움을 만들어 나갈 때, 조직적으로는 유일하게 노동자 활동에 관여한 것이 교회였고, 민주적 노동운동단체는커녕 대중적 상담소 하나 없는 상태에서 교회가 노동운동에 기여한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교회는 노동자들에게 교육 활동과 토론 문화를 통해 최소한의 민주성 확립과 취미 활동을 매개로 한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지만 한국노총에 대응하는 조직의 상과 전망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교회는 자유주의 노조운동의 조직적, 이념적 성격을 객관적으로 자리 매김하며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지연시키는 장애물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운동이 시작되는 80년대부터 교회는 민주노조운동과 긴장과 갈등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 80년대에는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세력화가 하나의 큰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과 전민노련사건, 구로연대파업을 계기로 조직된 다양한 급진노동정치조직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저자는 이들 조직들의 이념과 이론 그리고 구체적 실천 사이에 드러난 긴장과 모순에 주목하면서 그 부침을 당시의 정치정세 속에서 살피고 있다. 이 속에서 저자는 급진노동운동이 자본과 파시스트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고군분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실패하였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 그 하나는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과의 교호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진보, 좌파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그 과거는 이 순간에도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책의 내용 가운데 무엇보다 필자에게 절절히 다가온 것은 90년 초반의 '노동운동 위기 논쟁'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해소를 다룬 부분이다. 이것은 당시에 필자가 전노협과는 분리될 수 없는, 전노협의 마지막을 책임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노협 건설은 한국노총 외에 또 하나의 중앙 조직을 만든 게 아니었다. 전노협은 단지 당시 정세 반영의 결과물이 아니라 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반성의 귀결이었으며 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한 결의의 표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노협은 국가와 자본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고 온 몸으로 전개한 투쟁의 결과 가입노조 수와 노조원 수의 감소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것이 '노동운동 위기'를 말하는 주장들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업종회의 소속의 노조들과 일부 대기업 노조들이 전노협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인식한 위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에서 불참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술의 차이로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전국회의'에서의 결의와 달리 대기업 노조와 업종노조가 전노협과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은 그것의 급진성, 전투적 노동조합에 대한 부담과 거부감 때문이었고 노동자 계급 내부 각 세력들의 상이한 이념, 정치적 지향, 운동 경험 등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저류에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질긴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의 이념, 노선에서 하향평준화로 나아간 '전노대'의 출범 이후 민주노총의 출범으로 일단락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재구성 과정'이 전노협으로 상징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과 기본정신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필연이었는데 이에 좌파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진보, 좌파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더 중요한 문제는 당시 '노동운동 위기론'이 단지 전노협과 급진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판들이 그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87년 정치적 개방 이후 신군부와 타협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역사적 방기에 대한 많은 대중적 혐오와 비판을 노동운동, 특히 급진노동운동에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그 인식, 인정 여부를 떠나 전노협, 급진노동운동에게 '타협에 의한 민주적 조합주의', '진보적 조합주의'를 내세우며 '노동운동 위기론'을 주장했던 것은 전노협 건설을 계기로 전개된 노동운동의 새로운 재편과정에서 급진노동운동세력을 '사회정치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기획'의 표출이었다고 본다.

지금 이러한 내용을 숙독하면서 당시 논쟁의 장에서 함께 격론을 벌였던, 그렇지만 지금은 노동정치의 현장에서 잘 볼 수 없어 그들과 이 문제들을 다시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없게 된 현실이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위기론자'들에 의해 급진운동이 정치적 타격을 받아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던 지난날의 흔적들은 분명 아픔의 상처로 자리하고 있지만 그 아픔은 반성과 결의를 넘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위기론자'들이 지금 유명한 정치인, 지식인, 사업가가 되고 유수한 공기업체 임원이 되어 그 가운데 일부는 노동자계급을 통제하며 삶을 연명하는 '탕아'가 되었을지라도 당시의 논쟁과 실천을 지금 현실 속에 복원시켜 다시 성찰해 보는 것은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운동 위기 논쟁'은 전노협건설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무차별적인 탄압의 와중에 증폭되면서 전체 노동운동에서 급진성, 전투성을 거세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 결과 이 논쟁을 거치면서 '변혁적 노동운동'은 이른바 대중이 참여하고 사회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게 되었고 대중적 민주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공세에 무기력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상황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위기 논쟁'은 급진노동운동이 현실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과잉 평가하는 것을 통해 노동운동 일반으로부터 '계급적 노동정치'를 제거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혐의가 강한 기획의 결과였다. 이들은 "변혁적 노동운동그룹의 급진성으로 인해 노동운동의 발전이 제약되었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이들 중 일부는 '전노협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조직'이라고까지 폄하하며 전노협의 노선변화를 압박하기조차 하였다. 이런 주장을 했던 자들은 87년 이전의 급진운동의 역사와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을 둘러싼 단순한 조건들에만 주목했던 게 틀림없다.

이런 기획의 성과로 시작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은 한 정파의 노선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계급의 범주를 새롭게 형성하려는 의도와 맞물린다. '진보적 조합주의'에서 사용하는 계급의 범주는 노동자를 '국민'으로 대체하기에 실제로 계급의 잣대를 스스로 짓뭉개고 본질적으로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헤게모니에 동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가.

계급적 노동정치에 대한 타격과 함께 출발한 민주노총은 지금 80만의 조합원을 조직하여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체로 활동하고 있다. 조직의 전망이었던 산별로의 재편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계급 정치 지향'이라는 위상으로 건설된 민주노동당은 분화되었고 '노동자 정치 세력화'의 화두는 의회에 한 구석진 곳에서 맴돌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중앙조직 건설과 산별건설이 형식적으로 완성되고 있는 지금 이들에게 쏟아지는 끊임없는 비판과 질책을 접하면서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자주성과 민주성, 계급성과 투쟁성, 변혁지향에 대한 희망들이 잦아들고 제2, 제3… 수십 명의 또 다른 전태일이 자본과 권력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어도 공장은, 이 사회는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비정규악법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불안정노동으로 노동자 계급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내 몰리고 있어도 그 흔했던 계급적 연대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조직력의 열세와 대중적 결의가 부재할 때 그것을 돌파하고자 결행했던 '선도투'의 기획은 실종된 지 오래다. 집회에서 힘 있게 펄럭이던 '노동해방'의 깃발도 내려진지 오래다. 붉게 타 올랐던 적색의 함성이 차츰 잿빛으로 변색되어 눈앞에 나풀거린다. 그러나 절망 속에 한탄하고 주저앉아 있기에는 불꽃같은 세월들이 자꾸 시야에서 꿈틀거리며 어느덧 눈가를 흐리게 한다.

3.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숱한 변화 속에서 돌출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급진을 도모하고 좌파의 자존심으로 기필코 해방된 세상을 맞으려 실천했던 그 때, 그리고 지금 그 끝을 놓지 않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또한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이 노동계급의 희망이며 노선이라고 강조하던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진보적 노동운동'을 강변하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활동하는 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십 수 년 전 급진운동을 통해 혁명을 주장하며 전술, 전략에 대한 불철저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원칙을 강조했던 숱한 사람들, 그 중엔 진보정치에 새로운 장을 열겠다고 외치다 지금은 뉴라이트의 지주 역할을 하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들도 있는데, 그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왜?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그 시대가 낳은 모든 성과, 한계와 오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우리 시대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치열하면서도 억척같았던 논쟁들, 그 논쟁의 성과보다 숱한 한계와 문제와 오류를 남발했던 80년대 정치지형의 굴곡과 함께 현재를 조명해야 하는 건 필자를 포함한 급진적 노동운동과 좌파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80년대 급진운동의 모습을 다시금 돌이켜 보고 냉철한 진단과 평가에 근거하여 다시 그 길을 새로이 닦기 위한 좌파재구성의 잣대를 마련하고 실천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잊혀져가는 기억의 한 자락을 부여잡으며 좌파운동의 고민과 함께 미래를 열어갈 성찰의 계기를 준 저자에게 좌파의 한사람으로써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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