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여행이라도 갈 것처럼 부산하게 집안을 정리하던 딸의 입에서 문득 이 말이 떨어졌을 때 가슴이 무너지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현실감 없이 느껴져 웃으며 면박을 줬다가, 그것이 진심임을 알고는 화를 내고, 설득도 했다가, 울며 매달리고, 비난도 해보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 와중에도 딸을 안쓰러워하는 어미의 심정을. 하지만 그 자신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 그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세상을 등지고자 결심했던 그녀는 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던 걸까.
▲ 잘 자요, 엄마 |
'제시'는 오랫동안 간질을 앓았고 남편과는 헤어졌으며 하나뿐인 말썽꾼 아들도 가출하고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노모인 '델마'와 단둘이 살면서,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기운 때문에 엄마의 친구가 집에 놀러오기 꺼려하는 것도, 남편이 결국 자신을 떠난 것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 상태다. 그녀에겐 더 이상 삶을 지속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도, 생존 의지도 없다. 삶이 살아지는 대로 그냥 견디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녹슨 총을 찾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날, 홀로 남아 자신의 시체를 치워야 할 엄마가 걱정돼 그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 만다. 세상 어느 엄마가 "오냐 그래라" 할 리가 없다. 두 모녀의 격한 대화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과 숨기고 있던 비밀들이 드러난다.
모자관계나 부자관계와는 또 다른 모녀관계는 대체로 격렬한 애증과 서로에 대한 연민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딸들의 고달픈 삶은 언제나 세상 모든 모녀관계의 단골 레퍼토리인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와 '이제야 엄마 마음을 알겠어'를 단계적으로 반복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버지인 것과 달리, 어머니는 딸에게, 혹은 딸에게 어머니는 어느 순간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딸은, 결국 상대가 자신을, 자신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원래 친구란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가장 좋은 친구 관계란, 서로 다르다는 것, 어느 부분에 있어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함께 가며 지지하는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서로 타인일 수밖에 없는 부분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곤 한다. 아마도 남자관객이나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하는 여성관객의 눈에 이 연극이 영 낯설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제시가 결국 엄마 앞에서 자살을 행해서라기보다는 애초 수직적 혈연관계였던 모녀가 나이가 들면서 수평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 잘 자요, 엄마 |
제시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엇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피를 섞은 가족이라 한들 결국 타인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가족이란 언제나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여겨지고 실제로 심지어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부분, 혹은 숨기는 부분이 더 많은 관계다. 그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고독감이, 그리고 평생에 걸쳐 병과 상실감이 주었던 고통이 제시에게 너무나 강하게 드러난다. "그래도 살고 봐야 한다"는 델마의 설득이 당연히 옳다고 여겨지면서도, 제시에겐 그 말이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음을 동시에 이해하게 된다. 그 아픔 때문에 연극을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도, 결국 제시를 설득할 더 좋은 말을 찾을 수가 없어 더욱 눈물을 흘리게 된다. 제시의 총구가 소리를 울리는 순간, 결국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10년 전 델마 역을 연기한 뒤 한동안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이 작품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던 손숙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갈 것같다.
퓰리처 수상작이기도 한 마샤 노먼의 희곡 <잘 자요, 엄마>는 1982년 미국에서 초연된 뒤 국내에서는 85년 처음 막을 올렸고, 이후 꾸준히 공연되어 오다 이번 '연극열전 2'의 8번째 작품으로 다시 선택됐다. 마샤 노먼의 처녀작 <Getting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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