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인 춘화들에 대해서는 정말 신윤복이 그렸는지 그의 필치를 모방한 후대 다른 작가가 그렸는지에 대해 논란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춘화들이 아닌 그림들에서도 유독 여인들의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드러나있는 게 사실이다. 조선뿐 아니라 서구사회에서도 성을 엄격하게 대하고 억압하는 것은 주로 '여성의 성'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미셸 푸코가 통찰했던 바대로 공식적으로 성이 억압될수록 이면에서 성에 대한 담론은 넘쳐난다. <미인도>가 그리는 시대 역시 그러하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파격적인 청나라 춘화 체위재현 씬은 한편으로 신윤복이 에로티시즘의 세계를 접하고 흡수하는 씬인 동시에, 위선적이기에 더욱 음란했던 당대의 풍속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에로티시즘'을 정면에 내세웠던 것은 단순히 관객들에게 선정적인 호기심으로 어필하려는 것 이상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가 제시하는 신윤복 그림의 본질은 조선시대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성 윤리를 정면에서 조롱해대면서도 여기에 유머와 위트를 곁들인 에로티시즘이다.
▲ 미인도 |
문제는 이 영화가 그런 장점들과 의도들을 적절하게 표현해주고 있는가이다. 단적으로 저토록 중요한 목적과 의도를 지닌 춘화 체위재현 씬을 보자. 이후 나올 강무와 신윤복의 강도 높은 정사씬이 매우 아름답게 촬영된 만큼, 두 장면은 서로 극적인 대조를 이뤘어야 한다. 하지만 춘화 재현 씬은 선정적이기만 할 뿐 오히려 '충분히 음란하지 못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포르노 수준의 직설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음란한 것인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더러운 것으로 매도하고 억압하며 그 안에서 비틀린 특정 이미지, 특히 인간을 사물화시킨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것이 더 음란한가? 섹스의 다양한 체위를 재현하는 그 자체가 음란한 것인가, 선비들이 밀실에서 일종의 '포르노 라이브 쇼'를 즐기면서 여성의 육체를 사물화시키고 밖에서는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것이 음란한 것인가? 영화는 이 장면에서 시대의 음란함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채 오히려 기기묘묘한 체위를 재현하며 거짓 오르가즘 표정을 짓고 있는 여체에만 집중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역행하는 이 장면은 사실 '포르노 장면'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그렇기에 뒤에 이어지는 강무와 신윤복의 정사씬은 신윤복이 자신의 여성적 섹슈얼리티를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발산하는 매우 중요한 씬임에도, 다른 씬들과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면서 맥락과 의미를 풍부하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강무와의 정사씬 이후 신윤복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욕망을 구체적으로 품으면서 벌어지는 삼각관계 플롯이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갖는 욕망과 이의 충돌이 표현되는 방식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김홍도의 욕망과 굴절이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지나치게 상투적일 뿐만 아니라, 그 표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섬세함과 다층적인 심리가 결여돼 있다. '독화살 에피소드'는 대체 왜 들어가야 했을지 이유를 알 수 없으며, 기생 설화의 존재도 그저 이야기를 꼬기 위해 기능적으로만 움직이는 인물로만 그려진다. 김홍도에게 애틋함을 표현하는 신윤복의 정서와 행동 역시 적절한 설명이 표현되지 않는다. 사회적 영역에서 남성과 사적 영역에서 여성을 오가던 신윤복이 당대의 가치에 세태와 정면으로 부닥치고 갈등하며 탄압당한 뒤 마지막 장면에서 그려내는 '미인도'는 응당 해탈과 승화의 그림이 되어야 했건만, 영화에서는 그저 신윤복이 여인의 몸과 옷 속에 갇혀버린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는 <미인도>가 애초 지향하고자 했던 주제와 목적에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뜻이 아닐까.
에로티시즘에 대한 일관된 철학과 통찰이 없는 에로티시즘은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그냥 에로다. 흥행몰이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냥 에로'든 '에로티시즘'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냐마는, 제대로 된 에로티시즘을 기대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입맛이 영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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