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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은 당신은 희망이 없다"

[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 2.5 : 꿈을 잃어버린 세상의 풍경

지난 글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자"고 했으니 '다른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순서겠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왜 꿈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잠깐 이야기할까 한다. 그래서 '3'이 아니라 '2.5'다.

우리는 꿈이라는 단어를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으로 쓰곤 한다. 하나는 전혀 쓸모없는 망상의 뜻으로,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뜻으로. 이 글에서 꿈은 전적으로 후자의 뜻이다.

사회적 꿈, 즉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사회적 태도를 이상주의라고 한다. 이상주의는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하게 하며, 기존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현실 속에 담겨 있는 다음 세상의 표징들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상주의는 사회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이상주의가 무작정 좋은 건 아니다. 지나친 이상주의는 현실적 조응력을 잃고 소수 지식인들의 관념 놀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이상주의보다 심각한 것은 이상주의가 사라지는 것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사회,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생각을 중단한 사회, 모든 사람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회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80년대의 한국 사회가 지나친 이상주의의 시절이었다면, 90년대 이후는 반대로 이상주의가 빠르게 사라져가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08년에 이르러 한국은 이상주의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와 우경화의 바람으로 이상주의의 퇴조가 세계적인 흐름이라지만, 이렇게 이상주의가 무작정 혐오되는 사회는 찾아볼 수 없다.

혐오는 가히 히스테리에 가깝다. 이상주의는커녕 현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맥락을 밝히려는 태도조차 "80년대식 낡은 태도", "비현실적 거대 담론" 따위로 매도당하곤 한다. 대체 무슨 사연이 이런 삭막하고 어리석은 풍경을 만든 걸까?

80년대 초까지 절차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에 머물던 한국의 지식인과 청년들은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선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변혁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자신들이 동경해마지 않던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이 무너지는, 그것도 인민들에 의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그들은 '내가 대체 뭘 한 걸까'하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람이란 자기가 온 열정을 바쳐 한 일에 좌절할 때, 일이 그렇게 된 원인과 이유를 자신의 문제로부터 찬찬히 성찰하고 살피면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언제나 아주 적다. 결별한 연인이 결별의 원인을 상대에게서만 찾으려 하듯, 사람이란 문제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찾으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좌절의 상처는 그 사람의 정신 속에 옹이 박혀 남아 내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한국의 80년대에 변혁 운동에 투신했던 지식인과 청년들이 그렇다. 그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관념성을 성찰하고 현실사회주의의 공과를 분석하며 사회진보의 전망을 다시 모색했다면 그들 자신에게나 한국 사회에나 얼마나 좋았겠냐만 그런 사람은 아주 적었다. 대개는 자기혐오에 젖어 80년대를 청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사의 얼굴을 하고 '세상이 변하려면 사회 구조가 아니라 내가 변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론의 부족이 원인'이었다며 유럽의 최신 이론을 수입하는 데 열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대 담론 위주의 운동이 문제'였다며 소액주주와 시청료 문제에 몰두하기도 하고, 또 어떤 뻔뻔한 사람들은 운동으로 얻은 이름을 팔아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는 '시민'이 되었다.

살아가는 양태는 다양했지만 그들의 정신에 크게 남은 자기혐오의 흉터는 같았다. 그리고 그 흉터는 그들로 하여금 한 가지 사회적 태도를 공유하게 했다. 바로 좌파적 상상력에 대한 혐오,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다.

어떤 사람들은 80년대 이상주의자들이 90년대 이후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들로 등장하면서 많은 유익을 가져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평가를 전적으로 부인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유주의가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의 건강성을 갖지 못한, 즉 전근대적 속박과 암흑을 깨부순 해방 정신으로서 자유주의가 아니라, 심각한 자기혐오에서 잉태된 병든 자유주의였다는 점이다.

사실 한국처럼 정신적인 갈피를 찾을 수가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우편향의 사회에선, 자유주의자의 양식만으로도 선거 때 진보정당 후보를 찍는 정도의 실천은 가능하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서 그런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예는 고종석이다) 그 자유주의가 병든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이런저런 개혁운동과 대형 시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활동을 '달라진 세상의 진보'라 강변하면서 좌파를 아예 존재조차 부인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도 그 병든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거 때만 되면'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우파 후보를 찍는 자칭 좌파들도,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급진적인 사람은 모조리'쓸모없는 인간들'로 깎아내리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좌파들도 마찬가지다.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는 이른바 '계몽'에 대한 혐오로도 나타난다. 그들은 말한다. "대중을 지도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다."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80년대에 자신이 했던 계몽운동이 바로 그랬기 때문이다. 80년대에 그들은 '우매하고 불쌍한 민중을 깨우치고 지도하여 해방'시키려 했다. 그들은 80년대를 청산하면서 이상주의에 대한 혐오라는 자기혐오의 부록으로 계몽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계몽의 진정한 의미가 사회적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 즉 제가 사는 세상의 얼개를 파악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라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계몽이 필요한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그 구조와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쏟아지는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 인터넷의 분방한 소통 속에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걸 다 보고 말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실은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대졸자가 차고 넘치는 사회에서 무슨 놈의 계몽이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놈의 한국의 대학이라는 곳이 사회적 안목을 키우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곳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대졸 성인은 사회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에서 좋게 보아도 프랑스나 독일의 중학생을 넘지 못한다. 계몽은 분명히 필요하며, 문제는 '계몽의 방식'이다.

진정한 계몽은 80년대처럼 지식인이 민중을 대상화하여 지도하고 영도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인이 대중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조선노동자가 배를 만들고 교원노동자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부가 농사를 짓듯 지식인은 '지식 노동'을 하는 것이다. 지식 노동의 요체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와 본질을 인문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문화 예술적으로 해명하여 사회에, 즉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사실 계몽에 대한 혐오는 지식인들이 현실의 구조와 본질이 명백히 해명되는 걸 두려워하는 심리의 반영이기도 하다. 현실의 구조와 본질이 해명되면 이상주의에 대한 병적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사회적 태도가 더 이상 정당하지 않게 되며, 그걸 기반으로 하는 피상적이고 즉자적인 싸움, 이를테면 미친 극우 인사들 따위와의 싸움을 사회진보의 주제인양 말하며 살아가기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몽은 일종의 금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희망을 잃게 된 건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불가능한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난 얼굴로'이명박은 물러나라' 구호를 외치다, 휴대폰으로 학원 빠진 아이 야단치는 게 우리의 꿈인가? 이명박을 물리치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사람을 다시 부르는 게 우리의 꿈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희망도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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