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여당의 '대기업 Pre-Workout 법제화'방침은 '합법화' 외피 걸친 관치금융 시도에 불과
건설사 대주단협약 방식을 모든 업종 대기업에 적용가능하도록 하려는 것
모든 기업 살리려다 모든 기업 죽이는 관치금융 폐해 재연 우려
기업구조조정은 은행의 자율적 판단 존중하고, 유사 공적자금 남발 억제해야
1. 지난 일요일(11월 9일)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부실징후기업에 대해 자금지원과 구조조정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는 기업들의 부실징후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률구조"만을 갖고 있다며, 세계 금융위기가 실물부문으로 급속히 전이되어 건실한 대기업의 흑자도산이 우려되는 상황에 "미리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 이미 당정 간에 그런 시스템을 갖추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부여당이 실물경기의 급격한 위축에 대해 '비상한 경각심'을 갖고, 또한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합법적 장치'를 모색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임태희 의장이 언급한 사전예방 시스템(Pre-Workout)의 법제화가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에 얼마나 효과적일지, 나아가 관치금융의 구태를 극복하고 얼마나 합법적인 틀을 갖출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1997년의 '부도방지협약'이나 2003년의 '4.3 카드사 지원대책', 그리고 현재의 '건설사 대주단협약' 등의 오류를 반복하면서, 관치금융에 합법의 외피만을 두름으로써 정책실패에 따른 도덕적 해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 현재 우리나라는 부실징후기업의 회생 및 구조조정을 지원할 수 있는 법률적 장치로서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하 기촉법)을 시행하고 있다. 기촉법은 채권금융기관과 채무기업간의 자율적 협의를 통한 구조조정, 또는 CRC·CRF 등의 시장기구를 통한 구조조정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여, 한시적으로 상법 및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하 통합도산법) 상의 각종 절차와 채권자 보호제도를 상당부분 완화함으로써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지원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애초 2001.8.14 공포되어 2005.12.31까지 유효한 한시법이었으나, 시한만료로 폐기되었다가 2007.8.3 재입법되어 2010.12.31까지 적용하도록 되어 있다.
애초 제정 당시부터 기촉법은 상법상의 주주권과 기업경영활동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소지가 있고, 또한 법 시행 이전에 형성·확정된 채권금융기관의 채권에 대해서도 적용토록 함으로써 소급입법 금지 및 신뢰보호 원칙에 위배된다는 등의 위헌 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실제 2005.4 서울고등법원은 직권으로 기촉법의 일부 조항, 특히 총 신용공여액의 3/4 이상을 보유한 채권금융기관의 찬성으로 채권금융기관협의회 의결이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채권금융기관의 재산권과 재판청구권을 제약한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청구를 제기하기도 하였다(2006.12 서울고등법원의 청구 취소로 사건 종결).
기촉법은 채권금융기관으로부터의 신용공여 합계액이 500억 원 이상인 부실징후기업(외부로부터의 자금지원 또는 별도의 차입이 없이는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금의 상환이 어렵다고 인정한 기업을 말한다. 기촉법 제2조(정의) 제4호 및 제5호) 중 경영정상화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대해 일정기간 채권행사를 유예하고, 채무재조정 및 신규신용공여 등의 지원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3. 이번에 정부여당이 밝힌 '실물경기 위축 사전예방 시스템'은 현재 채권은행이 중소기업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Pre-Workout'(Fast-Tract) 제도, 또는 채권금융기관 자율협정 형식으로 건설사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대주단협의회 운용협약'(이하 대주단협약)을 법제화하여 모든 업종의 모든 기업, 특히 대기업에도 합법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행 기촉법은 부실징후기업, 즉 이미 지급불능(insolvency) 상황에 이르렀거나 그 위험이 현저한 대기업 중 경영정상화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적용하도록 제한하고 있는데 반해, 새로운 사전예방 시스템은 지급능력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일시적으로 유동성부족(illiquidity) 상황에 처한 결과 흑자도산 가능성이 있는 대기업까지도 지원할 수 있도록 그 대상을 넓히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또한, 앞서 본 바와 같이 현행 기촉법 자체에도 여러 가지 위헌 논란이 제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전예방 시스템은 각종 절차와 채권자 보호제도를 현행 기촉법보다도 더 완화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4. 정부여당이 대기업 Pre-Workout 제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현재 건설사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대주단협약을 통해 그 내용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건설사에 대한 대주단협약과 기촉법의 차이점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원대상기업의 범주 : 대주단협약은 일시적인 채권행사 유예로 유동성 부족의 해소가 가능한, 회사채 신용등급 BBB- 이상의 건설사를 지원 대상으로 한다(협약 제11조). 반면, 기촉법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기존의 차입금 상환이 어려운, 즉 지급불능의 위험이 현저히 높은 부실징후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다만, 경영정상화 가능성이 있는 부실징후기업에 대해서만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주채권은행 또는 협의회는 회계법인 등 외부전문기관으로부터 자산부채실사 및 계속기업으로서의 존속능력평가 등을 받도록 요구할 수 있다(기촉법 제6조 제1항).
둘째, 채권행사 유예결정 : 대주단협약은 채권금융기관 또는 당해 건설사가 지원을 요청한 경우, 주채권금융기관이 즉시 이를 검토하여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 '무조건' 변제기일 1년 이내의 모든 채권행사를 유예하도록 하고 있다(협약 제12조 및 제13조). 즉 대주단협약의 경우 이에 가입한 채권금융기관은 주채권금융기관의 채권행사 유예결정에 무조건 따르도록 의무화되어 있다. 반면, 기촉법에서는 주채권은행이 부실징후기업의 지원을 위한 협의회 소집을 통보한 경우, 우선 금감원장이 채권금융기관에게 1차 협의회가 소집되는 날까지 채권행사를 유예하도록 '요청'할 수 있을 뿐이며(기촉법 제9조 제1항), 채권행사 유예기간의 결정 및 연장 등은 협의회에서 총신용공여액의 3/4 이상을 보유한 채권금융기관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기촉법 제9조 제2항, 제21조 제1항 제3호, 제22조 제1항).
셋째, 신규자금 지원 등 : 대주단협약에서는 신규자금 지원의 경우 협의회 의결이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신규자금 지원에 자율적으로 동의하는 채권금융기관만 지원의무를 부담한다(협약 제16조 제1항). 반면, 기촉법은 채권재조정 또는 신규 신용공여의 경우 협의회에서 담보채권 중 3/4 이상을 보유한 채권금융기관이 찬성하여야 그 효력이 있다(기촉법 제12조 제2항)
넷째, 반대채권자의 권리보호 및 절차 : 대주단협약에는 부실건설사에 대한 유동성 지원에 반대하는 채권금융기관의 권리보호를 위한 규정이 전혀 없다. 반면, 기촉법은 공동관리 절차의 개시, 채권재조정 또는 신규 신용공여 등의 사안에서 협의회의 의결에 반대한 채권금융기관은 자기의 채권을 매수하도록 청구할 수 있도록 하여 최소한의 재산권 행사를 보장하고 있으며(기촉법 제24조 제1항), 또한 채권금융기관 간의 이견조정 등을 위하여 정부·금융감독기관·채권금융기관·부실징후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를 제외한 제3자로 구성된 '채권금융기관 조정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기촉법 제26조).
다섯째, 취급자의 면책 : 대주단협약은 유동성 지원 이후의 지원 대상기업 채권과 관련한 부실에 대해, 동 부실이 취급자의 고의·중과실에 의한 것이 아닌 한 동 취급자를 면책하도록 하는 규정을 명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협약 제30조). 반면, 기촉법에는 이러한 면책규정이 없다.
5.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른바 채권금융기관 간 자율협약의 형식을 빌린 대주단협약은 지원대상기업의 범주 및 선정절차, 자금지원 의사결정 절차, 반대채권자의 보호, 그리고 지원 이후의 사후관리 측면에서 기촉법보다도 훨씬 더 완화된 규정들을 담고 있다. 기촉법에 대해서도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대주단협약과 유사한 방향으로 대기업 Pre-Workout 제도가 법제화될 경우 이에 대한 위헌 시비가 야기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채권금융기관의 자유로운 경영판단과 그 재산권을 심대하게 침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건설사 유동성 지원 방안에 대한 경제개혁연대 의견서'(2008.10.22)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수많은 채권금융기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법적인 권리와 의무의 공정한 이행 절차를 담보할 수 없는 자율협약은 결국 관치금융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이제 정부여당은 건설업에 한정된 대주단협약이라는 자율협약 차원을 넘어, 이와 유사한 형태로 모든 업종의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장치를 아예 법제화하려 하고 있다. 이는 구래의 관치금융에 적법절차라는 외피만을 두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치금융은, 그것이 형식적으로 법적 근거를 갖추고 있든 아니든 간에, 위기극복 및 건전한 경제 질서 창출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6. 대주단협약을 확대·법제화하는 방식의 관치금융이 실물경제의 위기극복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 어려운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에 따라,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한국경제 내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이제 한국의 기업과 금융기관의 상당수는 단순한 유동성부족 차원의 단계를 지나 지급불능의 상태로 진입하고 있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에도 과잉유동성을 기반으로 금융기관이 무모한 규모 확장 전략을 추구하는 경영상의 오류가 지속되었고(구체적인 내용은 경제개혁연대(2008.10.30), '국회는 은행의 경영실패와 정부의 감독실패에 대한 책임 물어야' 참조), 그 결과 건설업과 가계부문, 상당수 중소기업과 일부 대기업의 부실 위험이 크게 높아졌으며, 최근 이것이 금융기관의 재무건전성을 위협하고 자금중개기능을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다수 기업들이 단지 일시적인 유동성부족 상황에 처했을 뿐이며, 따라서 금융기관을 통한 '신속하고, 충분하며, 단호한' 유동성 지원으로 흑자도산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을 살릴 수 있다는 정부의 기본 입장은 현실의 어려움을 은폐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정부 정책의 핵심은 단순한 유동성 지원이 아니라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살 수 있는 기업(good company)과 살 수 없는 기업(bad company)을 구분해주어야 한다. good company와 bad company가 구분되지 않으면 시장은 모든 기업을 bad company로 취급하는 전형적인 역선택의 문제(adverse selection)가 발생하며,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유동성을 공급해봐야 자금이 good company에게로 흘러가지 않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의 문제가 심화될 뿐이다.
물론 정부여당은 '새로운 사전예방 시스템의 법제화'를 통해 유동성 지원과 구조조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 시에 유동성부족 기업과 지불불능 기업을 구분할 능력과 의지가 정부에게는 없으며, 결국 정부는 모든 기업을 살리려는 관치금융을 펼치다 모든 기업을 사지로 몰아놓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 1997년 외환위기 때도, 2003년의 카드대란 때도 예외 없이 확인되었던 현상이며,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오류이다.
7. 시장이 오작동하는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 정부개입은 무조건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기능을 복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금융기관과 기업의 재무건전성 및 생존가능성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시장에 제공하여야 하며, 그러한 정보에 기초하여 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지원 대상 기업을 선정·지원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만약 생존 가능성은 높지만 지금 당장은 지급불능의 상황에 빠진 금융기관과 기업이 많이 존재한다면, 이들에 대한 구제금융은 사회적 감시와 통제가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국회 동의를 거쳐 공식적인 공적자금을 조성하여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하여야지, 국책은행을 동원하는 유사 공적자금이나 민간은행의 팔을 비트는 관치금융을 남발하여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경제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또다시 구래의 낡은 방식에 의존한다면, 위기는 현실화할 수밖에 없다. 경제개혁연대는 정부여당이 대기업 Pre-Workout 제도의 법제화와 같은 미봉책에 머물 것이 아니라,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위한 보다 원칙적인 정책기조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감세 및 재벌규제 완화 등과 같은 이념적 국정과제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고통분담을 설득하고 사회통합을 실현할 수 있는 정책기조로 확고하게 전환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현 경제팀의 경질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