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립식 펀드 열풍이 지난 자리에 남은 것은 긴 한숨이었다. '주식형 펀드를 운용하는 금융회사는 왜 장밋빛 환상만 부추겼던 걸까. 금융전문가를 자처하는 그들은 왜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을까.'
입가에 맴돌던 이런 물음은, 한숨과 함께 연기처럼 날아가 버리곤 한다. 위험에 침묵하고 환상만 부추기는 금융회사의 행태에 분노하면서도, 대개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란 으레 그럴 수밖에 없다며 체념해 버린다.
"쿠데타 배후에는 다국적 기업이 있었다"는 깨달음이 기업 감시 운동으로
하지만, '이윤'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최근 벌어진 경제 위기는 "이윤 동기 앞에서 도덕은 사치일 뿐"이라는 그릇된 믿음이 그동안 쌓아놓은 이윤마저도 날려버린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지난 9월 <프레시안> 기고를 통해 "미국과 한국의 시민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정치적 경험을 통해 윤리적으로 다소 결함이 있는 지도자들이 사실은 윤리적으로보다 경제적으로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학습하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기고 전문: 영혼을 판 매케인, 팔 것도 없는 한국 보수)
뒤늦은 깨달음에 고개를 두리번거리지만, 이윤이 도덕을 짓누르는 상황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막막하기만 하다. 지난 21일 국가인권위원회 11층 배움터에서 열린 "다국적기업 관련 국제인권 기준 국내 적용을 위한 워크숍"은 이런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윤을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기업에 대해 인권과 윤리의 잣대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국제NGO(비정부 기구)들 사이에서 낯선 게 아니다.(☞관련 기사: "'삼성 식 경영'은 세계화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잣대를 국내에 들여오려는 시도는 흔치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오랫동안 강조해 왔던 국제민주연대가 이날 워크숍을 마련한 것도 그래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인권 지침을 국내에 소개하고, 적용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것.
이날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온 바트 슬릅 다국적기업감시센터(SOMO, Stichting Onderzoek Multinationale Ondernemingen) 선임연구원을 만났다.
1973년 창립된 이 단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13개 산업 분야 기업들에 대해 감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73년은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해다. 민주적으로 탄생한 아옌데 정부를 시체 구덩이로 집어던진 쿠데타의 배후에는 다국적 기업들이 있었다는 발견이 이 단체를 태어나게 했다.
"민족주의가 다국적 기업 감시 발목 잡는다"
22일 오후, 서울 필운동에 있는 국제민주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그가 꺼낸 이야기에서 두드러진 낱말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 민족주의)' 이었다.
■ 버마 군사정권과 한국 기업 - '버마 민주화' 요구 앞에 부끄러운 한국 ○"버마를 '겁 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한국,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한 고교생의 '버마민주화 프로젝트' 분투기 ○대우인터내셔널, 방산물자 버마 불법수출 의혹 ○"우리는 '80년 광주' 기억하는데 한국은 다 잊었나" ○ "해방 60년…이제는 '가해자'의 길 걸으려나?" ○ 버마, 대우인터내셔널 가스 개발 현장을 가다 ○ 아웅산 수지 환갑 맞아 버마 국경을 가다 ○ "대우의 버마 가스개발, 군부 만행속 진행돼" |
"(국제민주연대 등) 한국 시민단체들은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가 버마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하며 저지르는 인권 침해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해 왔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이 민족주의다. '가스를 개발해서 국내로 들여오면, 한국이 잘 살게 될 텐데 왜 문제를 삼는 것이냐'라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이런 예는 세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만 겪는 사례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국적 기업을 감시하는 활동을 할 때마다, 민족주의는 발목을 잡아왔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이런 장애물은 더 견고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그에게 다국적 기업을 감시해야하는 이유는 당연해 보였다.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겪는 시달림은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인 듯싶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왜 우리는 다국적 기업을 감시해야 하죠?"라고. 그리고, 이어진 대화를 간추려 아래에 정리했다.
"감시에서 벗어난 기업은 모두에게 해롭다"
바트 슬릅 : 글쎄, 당연한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보자. 정부는 우리 삶을 결정적으로 뒤흔들만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힘은 결국 세금에서 나온다.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정부를 감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민간 기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거대한 다국적 기업은 어지간한 정부보다 많은 돈과 인력을 움직인다. 전 세계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력 역시 작은 나라 정부보다 훨씬 세다. 이들 기업이 이처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소비자와 노동자에게서 나온다. 당연히 시민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감시에서 벗어난 기업이 시민의 권리를 망가뜨린 사례는 흔하다.
네덜란드에 '지스타'라는 의류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인도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외주 용역 노동자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단체들이 거듭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인도 공장의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 본사를 둔 회사가 다른 나라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현지 노동자와 주민의 인권을 훼손한 사례. 참 흔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사례에 대한 감시가 없으면, 더 흔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본사를 둔 나라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적 분위기가 이런 감시 작업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감시에서 벗어난 거대 기업은 불투명한 그늘에 방치된다. 그리고 투명하지 않은 기업은 결국 모두에게 해롭다. 기업 회계가 불투명해서, 결국 경제 전체에 해를 끼친 사례 역시 아주 흔한 일이다. 최근 경제 위기를 더 악화시킨 책임 중 상당 부분도 회계 보고 의무를 소홀히 한 기업에게 있다.
"'자발적 권고'만으로는 부족하다"
<프레시안> : 다국적 기업에 대한 감시는 한국에서 조금 낯선 주제다. 소수 활동가와 지식인의 관심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트 슬릅 : 다국적 기업에 대한 국제적인 감시 지침 역시 아직 부족한 면이 많다. 특히 환경 파괴 등에 대한 감시 영역에서 보완할 부분이 많다. OECD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에 대해 인권 존중,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 주요 근로기준 존중, 내부 고발자 보호 등 다양한 감시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모두 '자발적' 권고 조항이다. 그래서 한계가 있다. 아무런 강제와 실행 계획 없이, 기업들이 이런 기준을 자발적으로 따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프레시안> : 시민단체와 정부 등 공공 부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또 다국적 기업에 대해 감시하려면, 시민단체 역시 국제적인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협력이 잘 이뤄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트 슬릅 :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상적인 정보 교환이 중요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함께 만들어 내야 한다.
"기업은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할 책임이 있다"
이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게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움직임과 함께, 기업들이 내부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할 책임이 있다는 인식도 깊어지도록 해야 한다. '공개하고 설명할 책임(accountibility)'. 이게 중요하다.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서로 다른 곳에 근거를 둔 시민단체들이 협력하면서 활동할 수 있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다국적 기업이 시민의 권리를 훼손하는 일도 잦아진다. 기업의 책임과 시민단체의 활동이 잘 맞물릴 때만, 이런 사례가 줄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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