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산시장이 이처럼 맥을 못 추는 배경에는 시간이 갈수록 이탈 속도를 올리는 외국인이 있다. 강달러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인들은 증시는 물론 채권시장에서도 달러를 회수해나가고 있다. 이미 국가의 부도위험을 유추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인 신용부도스왑(CDS) 기준으로 한국은 신흥국가 중 가장 부도위험이 높은 국가로 외국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다시 보는 '낯선' 지수
23일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45.80원 폭등해 1408.80원에 거래를 마쳤다. 환율이 종가 기준으로 1400원선을 넘어간 것은 지난 1998년 6월 17일 이후 10년 4개월 만에 처음이다.
환율이 1400원선을 넘어서리라는 예상은 이미 전날 뉴욕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 1개월물 선물 가격이 1407.50원에 오르면서부터 감지됐다. NDF(None Delivery Forward)는 만기 때 처음 약속한 환율로 통화를 교환하는 선물환거래와 달리 만기일 환율과 거래일 당시 미리 약속한 환율의 차액만을 결제하는 거래를 말한다. 금융권에 따르면 NDF환율은 한국 현물환율의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전날 밤 NDF환율이 올랐다면 다음날 한국 외환시장에서 현물환율도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달러 강세가 세계적 기조라지만 원화 가치는 다른 나라 통화에 비해서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하락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분기 외환시장 동향'에 따르면 3분기말 현재 원-달러 환율(1207.00원)은 작년 말 936.10원보다 270.90원 올라 통화가치 하락률이 22.4%에 달했다.
인도 루피화(16.1%), 뉴질랜드 달러화(12.8%), 필리핀 페소화(12.3%) 등의 하락률과 뚜렷이 비교된다. 심지어 엔화와 위안화는 이 기간 달러화에 비해 가치가 절상됐다.
환율만 외환위기 당시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주가지수 역시 날개를 잃은 듯 추락하고 있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84.88포인트(7.48%) 폭락해 1049.71로 거래를 마쳤다. 장중 한 때 1030선까지 무너지며 세자릿수 진입 우려마저 제기됐으나 오후 들어 낙폭을 줄였다.
코스닥지수는 300선을 위협받은 끝에 26.58포인트(7.92%) 급락한 308.95로 마감,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장중 301선까지 밀리기도 했다. 현재 코스닥지수는 외환위기 이후 코스닥시장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자 지난 2004년 1월 26일 기준단위를 100에서 1000으로 단위 상향한 수치다. 2004년 이전 지수로 환산하면 30.9에 불과하다.
오전 장 개장과 함께 주식시장이 불안해지자 9시 48분 코스피 선물시장에 이어 10시 44분에는 코스닥 선물시장에도 사이드카가 발동돼 프로그램 매매가 정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코스닥시장은 이후에도 낙폭을 줄이지 못해 결국 오후 들어서는 역대 세 번째로 서킷브레이커가 발동, 거래 자체가 20분간 중단되기도 했다.
지수 폭락에 따라 코스피시장에서는 무려 118개 종목이 하한가로 떨어졌다. 국내 최우량주로 평가되는 삼성전자 주가는 3년 4개월 만에 50만 원선이 무너졌다. 정부가 지난 21일 건설대책을 발표했음에도 건설업종지수는 11% 급락했다.
올들어 외국인 매도 33조원…외국인 이탈 막을 길 있나
이날도 외국인은 '셀 코리아' 기조를 이어갔다. 비록 전날에 비해서는 그 폭이 작았지만 1000억 원이 넘게 순매도해 이번 달 들어 단 하루만 빼고 내내 이어온 매도 방침을 유지했다. 장이 급락하면서 투신권에서도 2000억 원이 넘는 순매도 물량이 쏟아졌다.
올해 들어 외국인의 매도 물량은 33조 원이 넘는다. 이 달만 4조 원이 넘는 주식을 내다팔았다. 이 때문에 외국인 비중이 높던 삼성전자 지분율은 60%대에서 40%대로 낮아졌다. 국내 주식시장의 외국인 지분율은 29%로, 증권선물거래소가 관련 통계를 낸 이래 처음으로 30% 밑으로 떨어졌다.
주식시장뿐만 아니다. 외국인은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채권, 부동산 등 모든 자산을 일제히 내다팔고 있다. 이달 들어 외국인은 3조 원이 넘는 채권을 내다팔았고, 외환위기 이후 헐값에 사들인 국내 부동산 중에도 일부를 시장에 내놓고 있다.
외국인의 셀코리아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환율도 크게 자극받고 있다. 이들이 매각한 돈을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로 바꿔 자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이 유난히 치솟는 이유다.
외국인의 한국시장 탈출 러시의 근본 원인은 물론 자국 금융시장 불안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경제위기가 온 세계로 확산됨에 따라 한국 등 신흥시장에 묻어둔 자금을 빼 안전자산에 투자하려는 욕구가 커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경제환경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의 경제 상황이 외국에는 심각한 수준으로 비치기 때문에 탈출 욕구가 높아졌다는 말이다.
23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한국의 5년물 CDS 금리는 한 때 500bp(5.00%)를 넘어서 사상 최대로 올라갔다. CDS는 투자대상의 부도위험을 나타내는 금리다. 부도위험 우려가 금리에 반영되기 때문에 높을수록 국가부도 우려도 큼을 의미한다. 한국의 CDS는 말레이시아나 태국보다 높다. CDS가 한 국가의 절대적 신용지표는 아니지만 그만큼 한국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시선이 많음을 입증한다.
루비니 "한국 또 하나의 금융 위기…가계부채가 진짜 문제"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22일 자신이 만든 경제사이트 'REG모니터'에 올린 글에서 "한국은 높은 금리와 단기외채 급증, 부동산 시장 둔화, 높은 식품가격과 유가 압력, 수출 감소 등의 취약성 때문에 또 하나의 금융위기를 맞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한국 시중은행의 외채 문제가 아니라 가계부채가 진짜 문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다만 한국이 외환위기와 같은 국가 부도사태를 맞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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