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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쉬는 귀한 예술 작품, '우리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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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쉬는 귀한 예술 작품, '우리 학교'

[인터뷰] '도요하시 초급학교' 재현한 안해룡 작가

지난해 3월 개봉됐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 학교>는 관객 7만 명을 돌파하며 국내 다큐멘터리 사상 최다 관객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는 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조선초중고급학교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재일동포의 삶을 생생히 보여줬다. 관객은 잔잔한 울림을 안겨주는 영화라고 호평했다.

바로 그 '우리 학교'가 지난 20일 동안 서울 한복판에 그대로 재현됐다. 지난 달 20일 시작해 10일로 막을 내린 다큐멘터리 작가 안해룡 씨의 전시회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도요하시>가 그것. 지난 5년간 일본 아이치현의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를 드나들며 자료를 모은 작가는 애초 10년 계획으로 진행하기로 한 작업의 중간 결실물을 모아 이번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 7일, 그를 만나기 위해 찾은 서울 문래동 문래예술공단 내 새한철강 건물은 입구에서부터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 전시장에 다다르니 '학교법인 아이치현 조선학교 도요하시 조선초급학교'라는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프레시안

"보통 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 연출됐다"

학교 간판이 붙어 있는 '교문'을 넘어 계단을 올랐다. 3층 전시장에 다다르는 계단의 벽면에는 2000년까지의 조선학교의 굴곡 많은 역사가 시기별로 붙어 있었다. 그 곳에는 안해룡 작가가 도요하시 초급학교에 머물며 찍었던 사진 속에 학예회, 운동회, 수업 현장 등 학생의 생생한 일상이 있었다.

인터뷰는 건물 옥상에 설치된 '교실'에서 이뤄졌다. 초기 형태의 일본식 목조 건물을 재현한 곳으로 한 쪽 벽면에는 도요하시 초급학교에서 직접 보내온 낱말판이 그대로 붙어있고, 건너편 벽에는 그 곳의 27명의 학생과 젊은 교원 그리고 학부모의 사진이 옹기종기 모여 걸려 있었다.

작가는 어떻게 그 곳, 도요하시 초급학교와 인연을 맺게 됐을까 궁금했다.

"우연한 기회였다. 2003년 도요하시 학교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가 열렸는데, 그때 함께 할 한국의 음악 그룹을 선정하는 작업을 하게 되면서 처음 그 학교를 알게 됐다. 그 일이 계기가 돼 2004년 학예회 때 처음 학교를 방문했다. 우리 농촌 마을 잔치 같은 학예회 모습을 보며 보통의 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느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학교를 드나들기 시작했고 학교의 역사와 동포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벽면에는 1945년부터 2000년까지의 조선학교의 굴곡 많은 역사가 시기별로 전시되어 있다. ⓒ프레시안

도요하시 초급학교에는 여느 조선학교와 같이 '고난의 역사'가 배어 있다. 강제 연행으로 일본에 머물게 된 이들이 곧 조국에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임시로 만들었던 공부방이 바로 지금의 도요하시 초급학교의 모태다. 해방이 되고 많은 이들이 1960~70년대 북한으로 귀국하면서 많은 조선학교가 사라져갔다.

이 곳을 떠나지 못해 남게 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남과 북의 격렬한 갈등 속에서 남도 북도 아닌, 그러나 여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제3의 존재로 살아야만 했다. 한국인의 말과 글, 문화를 잃고 싶지 않았던 이들은 학교를 지켜냈다. 도요하시 초급학교는 일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교육 과정을 만들어 운영을 했고 1967년에 비로소 법인을 인정받아 정식학교가 됐다.

"세대는 변했지만, 학교는 커뮤니티로 남았다"

1980년대 재일 학원 간첩사건, 민단과 총련의 대립, 일본인들이 보인 반감 등 남북의 사상적 갈등과 한일 관계, 그리고 북일 관계 등 복잡한 현대사는 그대로 이들 삶의 굴곡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대 교체가 이뤄져 1세대는 2세대로, 2세대는 3세대로 거듭나면서 상황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처음엔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황도 조금씩 바뀌고 세대가 바뀌면서 의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조선초급학교 입학은 대개 부모에 의해 결정된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급학교를 졸업한 후 중고급 학교로 올라갈 때는 조선학교로 갈지 일본학교로 갈지 아이들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이들은 이미 일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 중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도,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일부는 아직도 조선의 '적'을 유지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때 마침 도요하시에서 이 전시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두 방문객이 전시장을 찾아 안해룡 작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황충굉 씨는 사진 속 한 인물을 가리키며 바로 자기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일본에서 나처럼 조선 '적'을 가진 사람은 이제 소수"라며 "공항에서 1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서야 입국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남도 북도 아닌 '통일된 하나의 한국'에서 비로소 한국 국적을 다는 것, 그의 희망이라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들에게 조선학교는 무슨 의미일까. 그들은 왜 이렇게 학교를 지키려고 할까. 안해룡 작가는 도요하시 초급학교는 학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 프로젝트 빔을 이용해 벽면에서 도요하시 초급학교 구성원들의 사진을 볼 수 있게 했다. ⓒ프레시안

"학예회와 졸업식, 운동회, 각종 지역 모임까지 이들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모든 정보가 교환되는 공간이자 생활 공간이며 문화공 간이다. 매우 큰 응집력을 갖는 지역 사회 커뮤니티인 셈이다.

인상적인 것은 어디서든 자신을 발표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의미 있고 잘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문화적인 행위를 반복하면서 학습되는 모습은 우리 나라 공교육에서는 보지 못한 그런 모습들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조선학교를 과도한 민족주의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을 경계했다.

"이들에게 학교는 민족이라기보다 차라리 가족과 같은 공간이다. 유치원에서 초급학교 6학년까지 반이 한 번도 바뀌지 않는다. 학생들을 둘러싼 학부모, 교원 모두가 합쳐진 큰 규모의 가족이라고 볼 수 있다.

오사카 시에 있던 많은 조선학교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데 이 작은 동네의 도요하시초급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소수집단(minority)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들 힘으로 살아 숨쉬는 커뮤니티를 지켜가고 있는 것이고, 나 또한 이런 그들의 모습을 계속 담아내고 또 함께 하고 싶다. 조선학교의 역사와 현재 그 자체가 바로 예술작품이라는 자각을 그 곳 동포들에게 선물하는 게 내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부와 바람을 담아 말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정말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어떻게 그 곳에 가서 살게 됐고 또 현재 왜 애써 학교를 지키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단편적인 지식만이 전부다. '자랑스런 한국인' 외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 바깥에 존재하는 재일 동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전시였기를 바란다."
▲ 옥상 위에 만들어진 일본 초기 목조식 건물의 교실. ⓒ프레시안

▲ 도요하시 초급학교에서 직접 보내준 그들이 사용하던 낱말판. ⓒ프레시안

▲ 옥상 목조 교실의 한 쪽 벽면에는 27명의 학생들과 젊은 교원들, 그리고 학부모들의 사진이 옹기종기 모여 걸려 있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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