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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 부호(富豪) 순위로 본 중국 신흥 재벌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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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 부호(富豪) 순위로 본 중국 신흥 재벌의 특징

[中國探究] <8> 자수성가형, 인텔리겐챠형, 그리고 태자형

미국 미디어 그룹 포브스(Forbes)가 발행하는 경제 잡지 포브스는 1917년에 창간되었으나, 1982년부터 게재한 '세계 부호 리스트'로 유명세를 탔다. 영문판에서는 1999년부터 중국 대륙 부자 리스트를 게재하였으며, 2003년 10월에는 중국 국내에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중국 부호 400명'을 발표하고 있다. 따라서 '포브스 부호 리스트' 기준으로만 보면 중국 부호(富豪)의 역사는 채 10년이 되지 않는 셈이다. 이들 중국 부호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초등학교도 못 마친 자수성가형, 해외 유학파이거나 대학 졸업 후 창업전선에 뛰어든 인텔리겐챠형, 고관대작인 부모나 본인이 일했던 국유기업의 후광을 업고 부자가 된 태자형이다.
  
  ▶ 업종별 부침(浮沈)
  
  짧은 부호의 역사만큼이나 중국 부호는 그 부침이 매우 드라마틱하다. 2003년 4월에 포브스는 중문판(中文版)을 중국에서 정식 발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중국 부호 리스트'는 각 부문별로 다양화되고 있다. 시나닷컴에서 다시 정리한 '2001년 포브스 중국 대륙 100대 부호' 1~20위 중에서 '2007년도 중국 400대 부호(중문판)' 1~20위에도 이름을 올린 이는 리우용하오(신희망그룹), 롱즈지엔(CITIC Pacific), 쉬룽마오(스마오그룹) 3명에 불과하다.
  
  2001년 리스트에 든 Top 20 부호의 주요 업종과 2007년을 비교하면 중국의 WTO 가입(2001년) 후 업종별 부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먼저 매년 20% 이상 성장하는 중국의 고정자산투자 증가율은 부동산업의 고성장을 극명하게 방증(傍證)하는 지표이다. 2001년 리스트 중 부동산을 주 업종으로 영위하는 부호는 6명이었으며, 2007년에도 7명으로 여전히 중국 내 성장을 주도하는 업종임을 나타내고 있다.
  
  2001년에 IT기업은 2개사(하이싱, 화다), 2003년에는 인터넷기업(왕이, 소후) 2개사가 20위권에 진입하였으나, 2007년에는 단 한곳도 20위권에 들지 못해 IT 및 인터넷기업의 몰락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 경제의 발전에 따라 전통 제조업(제지, 사료, 자동차 부품, 제약 등)은 2001년 Top 20중 12개를 점유하였으나, 2007년 Top 20에서는 8개로 감소세를 나타냈다. 그중에서도 태양 에너지기업 싸이웨이 LDK 총재인 펑샤오펑이 6위 부호에 처음으로 오른 것이 특이하다.
  
  중국의 WTO 가입으로 대외에 개방된 대표적 산업은 금융과 유통이다. 2007년 리스트에서도 그 특징이 보이는데, 전에는 없던 가전 유통기업(5위 수닝, 10위 궈메이)이 Top 20 중 두 곳이나 포함되어 있다. 이제 중국도 본격적으로 내수시장에서 부호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 부호 리스트는 졸부 리스트
  
  포브스 중국 부호 리스트는 졸부(猝富) 리스트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특히 2003년도 리스트에 올랐던 부호들이 연이어 자살, 사망, 체포 되면서 '포브스의 저주'라는 별명이 업계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중국 부호 22위(2003)였던 아이커라무 신장맥주회사 회장은 주식불법거래 혐의를 받고, 법원의 배상판결 직후 실종되었다. 하이신그룹 회장 리하이창은 동업자가 쏜 총에 피살되었고, 차오진링 황허그룹 회장은 자살했다. 상해를 떠들썩하게 한 저우정이(눙카이그룹), 신의주 특구장관에 임명되어 우리나라 매스컴에도 등장했던 양빈(어우야그룹) 등은 사기죄, 뇌물공여죄 등으로 철창 신세를 지고 있다. 1992년 뉴욕증권거래소에 화천자동차를 상장하여, 국내외 주목을 받았던 양룽(화천그룹)은 회사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자 미국으로 도피했으며, 미국과 중국 간 국제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처럼 부호 리스트가 졸부 리스트로 변모한 이유는 많은 부호들이 민영기업 출신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민영기업은 개혁개방 이전의 '결핍의 경제'시기에서 부를 축적했던 소규모 자영업자와는 달리, '과잉의 경제' 시기에서 경제 발전의 기회를 포착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혈연, 지연에 연연했던 개체호와 달리, 정규 대학을 졸업하고 선진기업 경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 활동도 열심히 하여 일종의 '보호막' 형성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고위험 고수익형 경영 방식을 선호했던 부호들 중 일부는 치밀하지 못한 기업관리로 인해 졸부의 나락에 떨어진 것이다.
  
  ▶ 제조업 – 궈광창(푸싱 그룹)
  
  올해로 만 41세인 궈광창은 중국 명문대학인 상해 푸단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대표적인 인텔리형 부호이며, 중국 대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창업형 CEO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92년에 자본금 10만 위안으로 과학기술자문회사 광신(廣信)을 창업했고, 15년이 지난 지난해에는 자산 362억 위안으로 중국 3위 부호의 반열에 올랐다.
  
  1992년은 덩샤오핑이 화남지역을 순방(남순강화)하며 개혁개방 의지를 천명한 때였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천명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고, 궈광창도 고민 끝에 유학 준비자금으로 광신과기자문공사를 창립했다.
  
  궈광창은 고위험 고수익 업종을 찾았고, 생물 의학 분야로 전업을 결정한다. 1993년 회사 이름을 지금의 푸싱(復星)으로 바꾸었으며, 첫 번째 제품은 B형 간염 진단을 위한 핵산증폭검사(PCR) 진단 시약이었는데, 이 제품으로 사세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푸싱의 자본금은 1995년에 이르러 1억 위안으로 늘었다.
  
  푸싱그룹이 사업을 확장하는 방식은 '살 수 있는 것은 빌리지 않고, 빌릴 수 있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이다. 현재 푸싱은 산하에 20여 개 제약회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처음부터 투자해서 설립한 곳은 한 곳에 불과하다. 이처럼 M&A를 통해 사세를 확장하면서 의료, 제약 부문에 주력하던 푸싱은 외형 성장에 한계를 느껴왔고, 그 대안으로 철강업을 주목하고 있다. 푸싱그룹은 2002년에 당산건룡유한공사 주식 30%를 매입하였고, 2003년에 남경강철 및 영파건룡의 지분 인수를 동시에 진행하였다. 또한 푸싱은 부동산, 도소매, 금융업 등에 진출하였으며, 이처럼 다각화에 성공한 궈광창의 다음 행보는 항상 업계의 관심 사항이다.
  
  ▶ 유통업 – 장진둥(쑤닝전기)
  
  쑤닝전기 회장 장진둥은 자산이 336억 위안으로 중국 5위 부호이다. 장진둥은 자본금 10만 위안으로 강소성 남경에서 에어컨 대리점을 시작한 지 17년 만에 자산규모 162억 2천만 위안(2007년)인 중국 최대 가전 유통업체의 대주주가 된 인물이다. 쑤닝전기의 시장 점유율은 5.4%이며, 유통전략은 '쑤닝 모델'이라 불리며 중국 내 가전 유통전략의 교과서적 모범으로 통해왔다.
  
  장진둥(1963년생)은 남경사범대학을 졸업 후 국유기업 사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 첫 번째 샤하이(下海) 열풍, 즉 철 밥그릇이던 국유기업을 뛰쳐나와 위험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민영기업 창업 바람이 불던 때였다. 결국 청년 장진둥은 고민 끝에 1987년에 철 밥그릇을 팽개치고 남경시 번화가에 에어컨 대리점을 차렸으며, 1990년 12월에 쑤닝전기의 전신인 쑤닝가전공사를 설립했다.
  
  90년초에는 에어컨 메이커가 10개 사에 불과하여 판매자 우위의 시장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진둥은 박리다매 원칙을 고수했다. 쑤닝의 또 다른 성공비결은 시장 메커니즘 활용을 들 수 있다.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에어컨은 사치품으로 규정되어 판매는 일부 국유기업이 독점했고, 여름철 성수기에는 자금력이 있는 대형 국유 유통상이 아니면 물량을 받을 수도 없었다. 반면에 비수기인 겨울철에는 공장을 가동하지 않고 직원에게 장기휴가를 주는 일도 있었다.
  
  쑤닝전기는 이러한 계절적인 시차와 시장경제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수익 모델을 추구하게 된다. 즉 제조사와 계약을 맺어 비수기인 겨울에 생산되는 물량을 저가로 확보해 놓는 것이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입도선매' 방식은 매년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쑤닝전기는 제조사에 대한 가격 주도권과 물량 확보를 통한 시장 주도권을 동시에 거머쥐게 되었다. 또한 쑤닝은 제조사와 협력, 전문적인 고객 서비스 제공, 규모의 경제 추구를 통해 전국적인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그 결과, 1996년에 24개 성, 자치구, 직할시를 커버하는 4000여 곳에 판매 대리점을 두게 된다. 장진둥의 발전은 중국 개혁개방과 그 맥을 같이하며, 샤하이를 통해 내수시장을 개척해온 전형적인 부호이다.
  
  ▶ 부동산 개발 – 장신(SOHO차이나)
  
  베이징에서 태어난 장신은 14세에 홍콩으로 이주한 후 영국 캠브리지대학(경제학 석사)에서 수학, 월스트리트에서 애널리스트로 활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4년에 그동안 쌓았던 경력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95년에 남편 판스이와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가 SOHO차이나의 전신인 베이징훙스실업유한공사이다. 1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SOHO차이나는 매출이 69억 위안(2007년)에 달하는 중국 대표 부동산 개발 회사로 성장했다. 장신은 중국에서 최초로 서구 예술을 건축에 접목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장신의 성공 스토리 절반의 주인공인 판스이는 중국 내 낙후된 지역으로 손꼽히는 깐쑤성 출신이다. 대학을 나와 지방정부 관료로 있다가 1987년에 부동산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심천, 하이난을 거쳐 1992년에 베이징에 올라와 베이징완퉁실업유한공사를 설립한 바 있다.
  
  SOHO차이나는 이미 베이징의 최대 부동산 개발 브랜드로 성장했다. 장신 부부는 회사명을 기존의 훙스에서 SOHO로 바꾸면서 인터넷이라는 변수를 고려했다고 한다. 1999년 말 장신 부부는 중국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인터넷에 눈을 돌리게 된다. 중국에서 이미 인터넷은 혁명이라 할 정도로 사람들의 생활패턴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인터넷을 통한 정보 교류로 이제는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장신 부부는 SOHO(Small Office Home Office) 개념을 분양중이던 아파트에 도입하기로 하고 명칭을 SOHO현대성으로 바꾸었다. 이는 장신의 성공 발판이 되었으며, 2002년에는 아예 회사명을 SOHO차이나로 변경했다. 2007년 10월 8일 SOHO차이나는 홍콩 주식시장 IPO에 성공한다. 이를 통해 장신은 자산 285억 위안의 중국 7위 부호에 오르게 되었다. 장신은 해외에서 귀국하여 부의 기회를 잡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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