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한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반공 정신병동 사회란 올가미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좌도 우도 한국전쟁의 피비린내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런 극단의 대립은 학문과 사상이 그야말로 풍성하게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을 시초부터 절멸시켜 버리는 고엽제이다. 고엽제가 뿌려진 불모의 땅에서는 기형아, 조숙아, 미숙아들이 속출한다.
시대착오의 뉴라이트가 그런 한국형 기형의 한 예이다. 식민지 지배 긍정론은 사실 마르크스의 전매특허였다. 전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식민지 근대화론만을 차용해 친일파 친미파를 넘어 숭일 숭미파로 변신하고, 사회주의를 증오하는 이런 기이한 이론을 도대체 이론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에 짝을 맞추어 뉴레프트를 해야 한다며 북유럽 사민주의의 수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이없는 상상임신이 아닐 수 없다.
김수행의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 수록된 신정완의 스웨덴 사민주의 분석은 왜 북유럽 사민주의가 한국에서는 태어나기 어려운지 글쓴이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민주의란, 그리고 영국 등의 복지국가 체제란 제3세계 민중들의 피와 땀, 제3세계의 천연자원을 무자비하게 수탈하지 않으면 안되는 착취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이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스웨덴의 복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자원을 제공해 주고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비서구 식민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스웨덴 사민당은 경제성장만이 복지국가 체제를 가능케 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웨덴 사민당은 볼보라는 자동차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는 대재벌을 키웠다. 한국과 비슷한 경제성장 방식이었다. 사회주의를 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를 육성(?!!)하는 전략이다.
따라서 경제가 침체되고 성장이 중단되면 사민주의와 복지국가는 작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초반 스웨덴에 금융위기가 닥치고 부르조아 정부가 집권하게 되면서 기존의 복지정책이 대폭 수정된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근원에서부터 생태 환경 문제를 외면하거나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까닭은 바로 이같은 강한 성장주의 때문이다. 경제성장은 생태적 전환과는 어울리기가 어렵다. 유럽 녹색당이 독자 정당 노선을 천명하게 되는 연유도 근원을 따지면 이런 사민주의 정당들의 뿌리깊은 성장물신주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북유럽 사민주의를 비롯한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녹색당이 제기한 생태주의 전략을 대폭 수용하긴 하지만, 이른바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전략으로 탈바꿈시켜 마치 생태주의를 수용한 듯이 그럴싸하게 포장을 바꾸었던 것이다.
자, 그런데 지금 자본주의와 유럽 사민주의를 가능케 했던, 에너지와 각종의 천연자원들이 고갈되어 가고 있다. '석유 생산 정점(Peak Oil)을 비롯한 식량정점론과 각종의 정점론(Peak Everything)이 그것이다. 기후변화 한 가지만 놓고 보아도 이제 더 이상의 경제성장은 범죄가 되고 마는 그런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제 정신을 가지고 사회와 생태 문제를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체제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면서 석유와 천연자원은 무한히 착취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민주의 복지체제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민주의 복지 체제란 심하게 말해 국가가 착취의 떡고물을 일부 노동자에게 나누어주는 체제이다. 진정한 복지는 그런 의존형 인간들을 수용하는 수용소식 복지체제일 수 없다. 복지는 국가가 아니라 자립과 자치의 지역공동체에 있다.
사민주의 복지국가론에서는 심지어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까지도 '돌봄 노동'이라 해서 돈으로 계산하고 국가가 이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국가가 출산과 교육을 담당하는 거대 빅브라더 체제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우애와 협동의 사회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상상력과 논쟁은 서구에서 직수입한 이론들의 소개와 적용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분석, 비판한 서구의 이론은 타산지석으로 우리가 배워야 한다. 그러나 지식과 배움은 거름을 만들어 줄 뿐, 정작 씨앗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와 문화와 토양에 맞는 씨를 뿌려야 한다.
김수행의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은 그런 토종의 씨앗을 뿌리려는 조그마한 시도로 보인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갑갑했다. 대부분의 필자들이 여전히 자본주의-사회주의 패러다임의 틀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우물안에 함몰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부도 직전의 다국적기업 해외지사 영업사원을 자처하는 것만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파산당할 리먼을 사려 했던 산업은행과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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