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용 상품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투기성이 짙어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정부가 발표한 키코 대책도 실효성이 떨어져 인위적인 조정만이 유일한 대책이라는 평가다.
"키코의 투기성, 너무 강하다"
2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2층 강당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근본적으로 키코가 효과적인 헤지 상품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발제를 맡은 김석태 동국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키코는 콜옵션 매도와 손실 구조가 비슷한 상품이다. 이렇게 투기성 짙은 장외파생상품은 태생적으로 시장에 나와선 안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외파생상품은 지수옵션, 개별주식선물처럼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라 거래소 밖에서 거래되는 파생상품을 뜻한다. 장외파생상품거래는 은행업감독규정시행세칙에 따라 장내파생상품보다 더 엄격한 투자자 보호조항이 적용된다.
키코가 가진 가장 큰 맹점은 헤지상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가입기업이 효과적인 헤징을 하기 어려운 투기성 상품이라는 데 있다.
효과적인 헤지를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헤지 상품이 기업이 노출된 시장 위험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환율이 올라 달러 지급 부담이 늘어나는 수출 중소기업에는 달러 매수 옵션이 키코에 붙어야만 헤지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키코는 콜옵션 매도처럼 환율이 설정가격 이상으로 오를 경우(Knock In)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효과적인 헤지가 이뤄지려면 환율이 변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포지션을 조정(다이나믹 헤징)하는 매우 복잡한 기법이 필요하다. 파생상품을 투자자에게 판매한 증권사가 일일정산(daily settlement)으로 기초자산 가격 변동 위험을 매일같이 없애는 게 다이나믹 헤징의 대표적 방법이다.
파생금융상품은 이처럼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어 전문가들도 쉽게 그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다. 단적인 예로 SK증권은 지난 1996년 JP모건과 장외파생상품 계약을 맺고 이 회사가 설계한 다이아몬드펀드에 투자했다 동남아 환시장 몰락으로 3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이처럼 관련 상품을 가장 많이 만지는 증권사도 그 위험을 쉽게 측정하기 어려운 게 파생상품이다.
김석태 교수는 "금융공학 전문가나 효과적으로 헤징할 수 있는 투기성 짙은 상품이 이처럼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시장에 팔렸다니 놀라울 따름"이라며 "키코 문제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중소기업의 피해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은행에 책임 물어야
이렇게 투기성 짙은 상품을 판매한 은행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판매자로서 책임을 다 하지 않았는지 면밀히 조사해야만 한다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석태 교수는 "은행은 전문가 그룹으로 고객을 대할 때 '신의성실의 의무(fiduciary duty)'를 가져야 한다. 고객보다 더 높은 윤리수준과 전문지식을 갖고 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과연 은행이 키코 판매 때 그런 자세를 가졌는지 의문"이라며 "법적 책임 여부를 떠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라고 비판했다.
김주영 변호사(법무법인 한누리)는 "은행법 38조에 따르면 금융기관은 상품 또는 유가증권에 대한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금 대출을 못하도록 정했다"며 "키코 판매가 일종의 금지업무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용록 인하대 교수(경실련 중소기업위원장)는 "일각에서는 중소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데 이처럼 손익 관계가 불공정하게 짜인 상품의 구조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은행에 도덕적 해이를 물어야 한다"며 "'환율 변동에 따라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상품의 위험을 알린 것은 제대로 된 설명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키코가 이렇게 많이 중소기업에 팔린 근본 이유는 이른바 '갑과 을' 관계로 짜인 은행과 중소기업 권력구조 때문이라는 게 중소기업 관계자의 주장이었다.
김태환 중소기업중앙회 통상진흥파트 파트장은 "중소기업 대부분이 갑을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신을 이용하는 주거래 은행이 상품 가입을 요청하면 거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상품 판매 때 제대로 된 계약과정을 밟지도 않은 은행도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관측된다. 김 파트장은 "대부분 파생상품 계약이 전화로 이뤄진다. 은행 직원이 전화로 '지금 상품 가입하실 거죠'하면 구두로 먼저 계약한다. 1~2주 뒤에야 계약서가 우편으로 오는데 위험 고지는 그 때야 처음 보는 기업이 대부분이다"며 "일부 은행은 아예 영어로 된 계약서를 보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실제 은행이 키코 문제를 두고 중소기업에 어떤 압력을 가하는 지가 명확히 드러난 사례가 있다. 지난 1일 <아시아경제> 보도에 따르면, 시중은행 한 지점 관계자는 금융감독원에 키코 관련 민원을 넣은 중소기업에 전화를 해 "민원을 취하하지 않으면 신규 대출을 중단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도를 넘은 횡포를 부린 셈이다.
정부 대책, 효과 있을까
이 때문에 전날 정부가 발표한 키코 관련 대책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진단이었다. 칼자루는 은행이 쥐고 있는데, 사실상 은행에 중소기업 지원 자율권을 부여한 정책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전날 정부는 중소기업에 총 4조 원에 달하는 유동성 지원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토론자들은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번 사태의 본질적 책임을 물었다.
김석태 교수는 "금융감독원이 제대로 키코 약관 심사를 했는지, 정부가 제때 대응했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라며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한 지난 6월 '정부가 키코 문제에 개입하라'는 국내 연구기관의 지적을 정부가 들었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제 해결 방법으로 다양한 대안이 나왔다. 김석태 교수는 키코 가입 기업과 은행, 정부 3자가 공동 책임지는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각 주체들이 일정 부분씩 실현된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별 손실 추정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됐다.
최용록 교수는 "중도 해지시켜 키코로 인한 추가 손실을 일단 막아야 한다"며 "정부는 은행이 중도 해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 교수는 보다 근본적으로 중소기업에 관련 지식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구가 나와야만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대적으로 경험과 지식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이 전문적인 문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중소기업 전용 전화 컨설팅 기구' 설립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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