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법 절차'라는 불심검문
경찰이 불교계 어른인 조계종 총무원장의 차를 뒤지는 일이 벌어졌을 때, 청와대와 경찰은 그것이 불심검문에 따른 적법 절차였음을 강변했다. 과연 그럴까?
경찰관 직무직행법 3조에 따르면, 불심검문은 "수상한 거동 기타 주위의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또는 이미 행하여진 범죄나 행하여지려고 하는 범죄행위에 관하여 그 사실을 안다고 인정되는 자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어딜 찾아봐도 함부로 차를 뒤질 수 있다는 규정은 없다. 단지, 질문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흔히들 불심검문하면, "주민등록증 까라"는 부당한 요구에 속수무책이긴 하다. 어쨌든 백번 양보하여 그럼, 경찰은 총무원장이 수상한 거동을 했다고 본 것인가? 아님 죄를 범했거나 범하려고 한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인가? 아니면, 경찰은 그저 그런 상당한 의심을 가졌을 뿐인가? 경찰이 불교계의 지도자까지 하대하는데, 그 명성의 티끌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다수 중생들의 처우를 말해 무엇 하랴. 법을 말하려거든 우선 법조항부터 좀 읽어보길 권한다. 우격다짐으로 저질러 놓고 끼워 맞추지 말란 말이다.
경찰청장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위법'?
어청수 경찰청장 왈, 어린아이를 위험한 시위 현장에 데리고 나온 것은 바람직하지 않단다. 아동학대죄의 적용 여부를 면밀히 검토 하겠다고 했다. 언제부터 법의 기준이 경찰청장 개인의 도덕적 신념이 된 것일까? 15만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사기를 한 몸으로 책임지고 있으니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번에도 역시 끼워 맞추기이다. 어불성설이다. 아동학대에 관한 국제조직(The international Child Abuse network: ICAN)은 1996년 재정된 공법인 CAPTA(아동학대방지와 조치에 관한 법률)에서 아동학대와 방임을 정의하길, "부모나 보호자등에 의해 저질러진 심각한 정도의 육체적, 정신적, 또는 성적 학대나 착취의 행위 또는 위해에 대한 절박한 위험상태를 저지르려는 행위를 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또한 1991년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정의한 내용은 "신체적 구타(폭력 ), 부적절한 취급(양육), 유기, 신체적. 성적 착취나 가해, 그리고 성적인 측면의 어느 한 부분, 또는 그 이상 에서 아동의 건강이나 복지를 위협하는 것"이다. 국내법인 '아동복지법'은 아동학대를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에 의하여 아동의 건강·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 또는 가혹행위 및 아동의 보호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유기와 방임을 말한다"고 규정했다.
유모차 부대가 아이들을 유기하거나 방임할 목적으로 집회에 데리고 나왔는가? 그렇지 않다. 국내법상 성립 자체가 안 된다. 글로벌 스탠더드하게 국제 기준으로 따져보더라도,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대, 착취, 위해하기 위해서 집회에 데려나왔는가? 아동의 건강이나 복지를 위협하고자 했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혹시, 부모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아동들을 집에 놔두고 거리로 나왔다면 오히려 아동학대죄가 성립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무릇 나랏일이란 어른들이 하는 것이지 애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유교적 도덕관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색소 섞은 물대포를 쏘고 인도, 차도 가릴 것 없이 연행해가는 경찰의 그릇된 의협심에서 보면 바람직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 아무 문제없다. 차라리 그냥, 유모차 부대가 싫다고, 유모차가 나오면 집회를 강경 진압하기가 너무 까다롭다고, 외신들마저 감탄해마지 않는 그 유모차의 행렬이 정권을 규탄하는 폼이란 것이 영 거슬린다고 말하라. 단 한 가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찰은 왕권에 의한 포도청이 아니라 민주주의 헌법에 근거한 국민 주권의 일환이라는 것을.
부자가 세금 더 내는 것은 '징벌적 질서'라는데…
긴 말 할 의지도 안 생긴다. 부자에 대한 맹목적인 미움이란다. 분노와 증오의 제도란다.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란다. 종부세를 사실상 없앤단다. 명분은 하나, '법'에 따른, 질서'를 바로 잡는 차원에서.
종부세는 그냥 부자도 아니라 대한민국 최상위 2%의 부자들만 내는 세금이다.(올해 초를 기준으로 종부세를 내는 가구는 28만 6354가구로 전체 가구의 2.1%) 그런 종부세를 사실상 해체하면서 한다는 말이, 세금을 줄여 세수를 늘리고 세율을 인하하여 경제를 살리겠단다. 언어도단도 이쯤이면 사회를 뒤집는 상상력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정부가 바로잡겠다는 질서란 것은 2%의 부자 밑으로 나머지 98%가 줄을 서는 아름다운 수직이고, 2%의 부자가 98%의 나머지와 세금을 균등하게 내는 기괴한 수평이다. 국민연금 주식 투자로 2조 1500억 원을 날려 먹고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강심장 정부다운, 원내에만 종부세 완화 혜택자가 88명에 이르는 한나라당스러운 역발상이 아닐 수 없다. 돈 많이 벌고 세금 더 내지 않는 것, 어떻게든 세금을 피하는 것. 그것은 옳은 법과 질서가 아니라 무작위로 가해지는 형벌이외다. 법과 질서를 외치는 정부의 조세관이다.
'화룡정점'…한시법이 60년간 타당한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다면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공상훈 부장검사)는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실천연대)를 가리켜 "북한의 체제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친북 이적단체"라고 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 간부들을 긴급 체포할 때 경찰은 "사노련의 당 규약과 강령에는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을 만든 뒤 당을 결성하고 최종적으로 남한을 사회주의화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법원은 혐의 내용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국가보안법, 압수수색. 그냥 휙 읽지 말고, 찬찬히 그 질감을 상상해보시라.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매우 치명적인 실수는 국가와 개인이 대립할 때, '잠정적으로 국가가 옳다'고 전제 하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보다 옳다는 이 믿음은 난폭한 지배자가 아주 손쉽게 민주주의를 착취하고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편리한 이데올로기가 됐다. 친근한 먹을거리를 훼손하려는 정부에 맞서 100여 일이 넘도록 촛불을 들었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여전히 국가는 언제나 옳은가? 아니면 지난 여름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할 텐가?
그렇지 않다. '국가보안법'은 형법이 만들어지기 5년 전, 민법이 만들어지기는 10년 전이었던 1948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해결의 명분을 갖고 태어난 '한시법'이었다. 아무런 법질서가 없는 상태에서 '여순사건 진압과 남로당 제거'가 사회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던 60년 전의 안보적 필요라는 얘기다. 이런 법이 7차례의 개악을 거쳐 여전히 살아남았다. 국가 보안을 위해서? 아니다. 그것은 탱크를 앞세웠던 쿠데타 정권이 자신들의 정통성과 민주성 결여를 돌파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서였고, 국민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할 수도 없게 만들고, 설령 어떤 것을 말하고 행동하더라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무엇에 본능적으로 웅크리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법이 다시 난동을 피고 있다. 혹시, '국가보안법'이 '대다수의 국민들과는 전혀 무관한 법이며, 일부 운동권과 주사파들의 난동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라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없다. 앞서 말했던 이 법의 생존 이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정권의 입맛을 위해서, 국면 전환의 필요를 위해서, 잠재적 반대자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보안법'은 존재한다. 아주 타당한 자유와 권리에 반하며.
'이중언어(doublespeak)'라는 것이 있다. '좌파 신자유주의', '전쟁은 평화다', '노예는 자유다', '무지는 힘이다' 같은 말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거짓말이다. 법과 질서를 강조하며 적반하장으로 법과 질서를 남용하는 정부의 이중언어가 작렬하고 있다. 대통령의 법 한마디에 언제까지 민주주의는 보랒빛으로 멍들어야 하는가, 이번 주의 열쇠말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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