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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를 꼭 땅에서 얻을 필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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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를 꼭 땅에서 얻을 필요가 없다고?"

[길에서 책읽기]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의 복수>

"정명(正名)이란 진실의 이름이다. 정명의 표류는 진실의 표류를 반영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언론인 김중배의 글 가운데 한 구절이다.
  
  2500년 전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려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반드시 그 이름부터 바로 세우고 싶다."고 답했다. (<이우재의 논어읽기>)
  
  공자는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공자의 정명론은 후세의 법가들이 논어에 삽입한 위작 논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진위야 어쨌든 바른 정치란 모름지기 이름부터 사실과 진실 그대로 바로 서야 한다는 공자의 지적은 만고에 바른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저탄소 녹색 성장을 요란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기가 차다 못해 말이 안 나온다. 저탄소란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11기 더 짓는다는 것이고 녹색 성장이란 배출권 거래 탄소 시장을 확대하고 자주 개발률을 40%로 늘린다는 얘기이다. 신·재생에너지를 지금의 2%대에서 11%로 늘리겠다는 얘기는 정부가 나서서 지금의 추세를 방해만 하지 않아도 달성되는 목표이기 때문에 그냥 숫자 놀음이라고 보면 된다.
  
  원자력을 11기 더 짓는다니 앞으로 얼마나 더 전국 방방곡곡이 갈기갈기 찢겨져야 하는지 앞이 캄캄하다. 자주 개발률을 40%로 높인다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국제 사기꾼들이 나서서 천문학 숫자의 국민들 세금 챙겨 도망갈지 줄줄이 쏟아질 무슨무슨 유전 게이트가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저탄소를 원자력으로, 녹색을 성장으로 바꿔치기 하는 그 무모한 언어의 연금술이 솔직히 부럽기까지 하다. 성장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성장은 에너지와 천연자원의 고갈로 조만간 불가능해진다고 말하는 녹색을 어떻게 하필 성장과 결합시킬 수 있을까.
  
  석유 고갈은 이제 그 시점이 언제인가를 놓고 논쟁은 있지만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가에너지기본계획도 이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에너지 분야는 화석연료 고갈, 기후 변화 등 인류사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때문에 "탈석유 사회로 전환"하겠다고 명시까지 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그나마 박수를 쳐줄만 하다. 그러면 당연히 에너지 소비를 그야말로 혁명의 수준으로 줄이고 석유 의존의 고에너지 투입 산업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2030년까지 에너지 소비는 해마다 1.6%씩 늘어난다.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산업 체제의 전환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포장용 선전 용어만 난무할 뿐이다.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은 2030년의 석유 기준가를 명목가격으로 113.1달러로 예측했다. 이 예측 수치가 달라지면 기본 계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과연 2030년에도 석유가가 지금과 같은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식경제부 관료들과 이명박 정부는 세 번째 석유 파동 사태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을 지구 의사로 착각하는 가이아 이론의 제임스 러브록이 이명박 정부의 초청으로 거액의 사례비를 받으며 한국을 방문하는 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녹색 성장은 전혀 코드가 맞지 않지만 적어도 원자력이 저탄소라는 주장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서구의 저명한 환경론자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의 복수>(세종서적 펴냄)를 읽다보면 가이아 이론은 인간과 서구 과학의 무지를 겸허하게 인정한 탈과학의 신비주의 이론이 아니라 철저히 서구 근대과학의 분석과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기술주의 이론일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동양에는 부처, 노자, 장자를 이어받아 가이아 이론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사상이 뿌리깊이 무성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상을 밑거름 삼아 일반 민중들도 천지의 생명체를 이웃으로 여기며 생태순환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해 왔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가이아 이론을 배태한 서구 근대과학의 앙상한 뼈대보다 훨씬 더 다채롭게 어머니 대지에 대한 찬미와 자연 순응의 삶을 살아왔다.
  
  물론 러브록의 문제의식은 심각하다. 그는 기후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으며 21세기에 우리들 가운데 수십억 명은 죽을 것이고 그나마 견딜 만한 기후가 남아 있는 극지방에서나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아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그는 극약 처방을 주장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후퇴를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재생 에너지도 비행기를 타고 가다 이 비행기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니까 풍력을 이용하는 프로펠러로 갈아 끼우자고 하는 격이라면서 지금 당장 개발을 멈춰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그나마 기후 변화의 유일한 대안은 다름 아닌 원자력이다.
  
  지구 의사의 처방전은 극단의 연속이다. 그는 80억 명 인구가 먹을 약 7억 톤(t)의 식량을 땅에서 얻을 게 아니라 발전소 배기가스나 공기 중에 있는 탄소화합물로 합성해서 얻자고 참으로 기발한(!) 제안도 한다. 그것도 핵융합 기술을 이용해서! 농경지를 없애고 땅은 다시 가이아에 돌아가 지구 기후와 화학 조절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식품 공장에서 만드는 인스턴트 당이나 아미노산이라니, 과연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한 과학자다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러브록은 서구 근대 기술주의 지식인의 종착역과 그 한계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는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이다. 거기에는 이미 근대화된 우리들의 생각과 서구 근대사상의 식민지인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이 그대로 들어있다. 그래서 꼭 읽어볼 만한 성찰의 책이다.
  
  러브록이 계산하지 않은 수치가 있다. 러브록의 말처럼, 그리고 원자력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제일의 명분이기도 한데, 원자력이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지 선정 이후 12년이 걸리는 원자력발전소 건설 과정과 고압선을 통한 전기의 수송 과정에서 1㎾h당 무려 66g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바람 발전은 9g, 바이오가스 발전은 11g, 바이오매스는 14~41g, 햇빛 발전은 32g이 발생된다. 이것도 서구 근대과학이 계산한 수치이다.
  
  그런 원자력 발전소를 도대체 몇 기를 더 지어야 하고 이산화탄소가 어떻게 줄어든다는 말인가.
  
  독재정권 시절인 1987년 1월, 박종철이라는 학생이 남영동에서 경찰의 고문으로 살해됐다. 김중배는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1987년 1월 17일자 칼럼을 이렇게 시작했다.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기를 바란다."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명칼럼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짙은 죽음의 그늘을 예감하고 있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에, 독성 화학 물질로 뒤범벅된 식품에, 기후 변화라는 쓰나미에, 에너지 고갈과 천연자원의 고갈 위기에, 그야말로 생명체와 인류 멸종의 허리케인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만 같은 위험 사회를 살고 있다.
  
  원자력은 결코 대책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산업구조부터 바꾸고 일반 시민들도 에너지 소비를 지금보다 열 배, 스무 배 줄이는 혁명이 필요하다. 대책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낡은 퇴행의 진보-보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명박 정부와 지식경제부 관료들도, 원자력-화석연료 동맹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다시 정명을 되새겨보아야 한다.
  
  진실로 우리는 저탄소 녹색성장의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 이름을 응시해야 하며, 녹색을 죽이지 말고 녹색을 지켜야 한다.
  
  (원자력 산업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원자력 노동자들은 다르다. 노동과 상품의 분리는 자본주의의 핵심 논리이다. 여기에 노동운동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한 편으로는 원자력 산업의 논리를 내면화한 종업원 의식이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이윤 생산의 도구이자 자본의 부속품 지위를 벗어난 독립된 주체로서의 노동자가 있다. 한 개인의 내부에서, 노동조합 내부에서 원자력주의와 에너지 전환이 내부 충돌을 빚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8월 29일,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주최로 '에너지 위기 시대, 에너지전환을 고민한다'는 제목으로 한국사회포럼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수원 노조의 윤창기 수석부위원장은 토론문을 통해 "원자력과 화석연료의 정점을 인정하고 새로운 에너지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에너지 수요를 어떻게 어느 정도 줄여나가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은 노동자들의 노동권 확보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함께 동반자로서 에너지 산업 체제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한수원 노조의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토론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그런 발언은 그저 이전과 같은 원자력 노동자들의 면피성 발언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에너지 단체들의 그런 반응은 또한 당연하다. 우리는 과거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래이다. 원자력 노동자들이 원자력 발전소 11기의 추가 건설이라는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들을 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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