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24일 <프레시안> 창간 7주년 기념 강연에서 이와 같이 말하며 "미국이 중국을 인정해 급격한 자산 가격 변동을 예방해야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조커 인정해야 존재할 수 있는 배트맨
정 교수는 지금 월가의 지진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자산에 기초한 경제가 일으킨 버블이 금융시장 안정을 방해한다는 점을 꼽았다. 지난 80년대 이후 늘어난 유동성 과잉이 일으킨 버블이 증권화에 힘입어 또 다른 버블을 낳았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 2006년 기준으로 세계 금융자산 총 가치는 전년에 비해 17% 늘어난 167조 달러에 달한다. 이 중 미국의 금융자산이 56조1000억 달러에 이른다. 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금융자산 비율은 350%에 달할 정도로 유동성이 넘쳐난다.
이처럼 커진 금융시장은 월가가 탄생시킨 파생금융상품의 고속 성장에 따라 그물망처럼 세계적으로 촘촘히 얽혀 있다. 미국이 흔들릴 때 다른 나라 역시 흔들리는 이유다. 당장 이번 금융위기에서도 미국 베어스턴스보다 영국의 노던록이 먼저 무너졌다.
따라서 근본 원인인 자산가격의 급격한 움직임을 사전차단하지 않는다면 미국발 금융위기는 세계로 지속 확산될 수밖에 없다. 정 교수는 미국이 중국을 인정해 시장 안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EU-중국 간 환율 안정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다면 현재의 혼란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중국의 금융시장 영향력을 인정해야만 한다"며 "3국 간 합의로 이뤄낸 새 정책을 미국이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언급했다.
사실상 미국이 달러의 세계 기축 통화 지위를 상당부분 잃더라도 유로화와 위안화의 지위를 끌어올려 근본 안정책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다. 다만 이 조치가 급격히 이뤄질 경우 세계 금융질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만큼 점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달러 약세는 인플레이션 등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실제 이와 같은 움직임은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뉴욕에서 개막한 유엔총회에서 세계 각국 정상들은 위기 대응을 위한 새 리더십 창출을 주문하고 나섰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대표 자격으로 행한 연설에서 미국식 금융시스템을 "미친(insane) 상황"이라고 성토하고 "국제 금융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혁을 위해 연내에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며 11월 긴급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중국을 새 파트너로 맞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의 금융시장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 1위의 달러화 보유국가며 세계 최대 자본순수출국이다. 중국 금융자산 가치는 지속적인 성장으로 8조1000억 달러에 달해 자국 GDP의 3배가 넘는다.
이에 반해 종전 세계 3대 증권거래 시장으로 군림한 일본은 지난 2006년 이후 사실상 금융시장 성장을 멈춘 상태다. 경기 침체 때문에 미국이 80년대 플라자합의처럼 자국 자산버블을 일본에 떠넘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일본 대신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대로 생각하면, 중국이 미국과 손잡지 않는다면 위기 확산을 막기 어려울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는 평가다.
정 교수와 함께 토론자로 나선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 흑자의 원천은 미국이다. 세계 제조업 생산기지가 중국에 몰려 있는데 미국이 아니면 이를 소비해 줄 대안이 없다"며 "단기적으로 미국 없는 중국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양국은 세계무대 패권을 놓고 으르렁대고 있지만 실상은 배트맨과 조커처럼 상대방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얻는 관계를 정립한 셈이다.
토빈세 논의 다시 일어날까
보다 직접적 대응책의 하나로는 점차 세계 경제학계에서 거론되는 빈도가 늘어나는 토빈세 도입이 제기됐다. 월가의 강력한 자본력이 세계로 무차별 확산하는 것을 적절히 규제해야만 파생금융상품에 의한 시장 급변에 대응할 수 있다는 이유다. 토빈세는 미국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이 고정환율제도 폐기 후 환율 안정을 위해 국가 간 자본 이동에 과세 필요성을 주창한 데서 나온 개념이다.
기조강연에 나선 김영호 유한대학교 총장은 "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월가의 대규모 자본이 순식간에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대다. 세계에서 하루 거래되는 상품이 300억 달러가 채 안 되는데 반해 돈은 2조 달러가 넘는다"며 "대규모 자본의 유출입으로 세계 금융시장이 교란되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나는 데도 이를 규제할 장치는 없다. 외환거래세(토빈세) 도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토빈세 아이디어는 그간 진보 진영과 제조업 강조론자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국제 금융계의 골칫덩이로 떠오른 투기자본을 적절하게 규제할 수 있는 데다 걷은 세금으로는 금융 약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 국가만 채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세계적으로 동시에 채택돼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세계 지도자간 합의가 없으면 현실적으로 도입될 수 없는 제도다.
한편 금융시장 위기가 낳을 새로운 변화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김 총장은 먼저 일본 금융업의 재도약 가능성 여부를 꼽았다.
노무라증권은 리먼브러더스의 해외법인은 모조리 인수했고, 미스비시UFJ금융그룹은 85억 달러 이상을 들여 모건스탠리 지분 20%를 사들일 예정이다. 김 총장은 "미-일 금융자본의 급격한 제휴가 이뤄지고 있다. 세계 금융자본의 새 판 짜기가 빠르게 이뤄지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일본이 과연 위기에 빠진 미국 금융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지부진한 '아시아통화기금(Asia Monetary Fund)' 창설 논의가 힘을 얻을지도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정 교수는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아시아의 금융공동체 창설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됐다"고 진단했다.
다만 이 논의를 이끌어갈 국가를 찾기 어렵다는 게 문제라고 정태인 교수가 지적했다. 중국과 일본은 최근 위기를 겪으며 태도가 전보다 전향적으로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 상대방에 대한 견제에 더 몰두하고 있다. 한국은 노무현 정부 초기에 관심을 보였지만, 노무현 정부 중기를 넘어서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면서 주도권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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