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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도 왕따시키는 일본 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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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도 왕따시키는 일본 극우

[김상수 칼럼] 일본 시민들에게 보내는 편지④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국 총리대신이 되다

망언(妄言) 정치인이자 전직 외무상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장이 일본 집권 여당 자민당 신임총재가 됐고 자민당 의원이 과반수를 차지한 중의원에서 일본국에 새로운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선출됐습니다. 아소가 외상이었을 때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2006년 2월 11일자에서 "아소 발언 외교가 너무나도 걱정이다, 麻生発言 外交がとても心配だ" 제목의 사설을 실은바 있습니다. 그 사설은 아소의 경망스런 처신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歯に衣(きぬ)着せぬ「本音トーク」は、麻生氏の政治家としての「売り」のひとつかもしれない。だが、首相の靖国神社参拝にからんで「天皇陛下の参拝が一番」と発言したのに続き、軽率に過ぎないか。日本外交を麻生氏に委ねるのは、極めて心配だ。

입에서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본심 토크'는 아소 씨의 정치가로서의 '밑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관련 '천황폐하의 참배가 먼저'라고 발언한 것은 지나치게 경솔하지 않은가. 일본 외교를 아소 씨에게 맡기는 것은 지극히 걱정된다."


일본 시민 여러분들께서도 다 아시겠지만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한국과 중국에서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일본국에 새로운 총리대신인 아소가 과거에 얘기했던 "우리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미국의 알링톤 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다"는 전혀 적절하지 못한 비유이면서 큰 착각이지요. 미국 알링톤 묘지가 야스쿠니 신사처럼 '전쟁범죄자'를 매장한 묘지는 아니잖습니까? 야스쿠니신사는 일본국 국가 국립(國立)시설도 아니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사설(私設) 종교시설이지요.

일본국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일본 헌법 20조에 <국가 및 기관은 어떠한 종교적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입니다. 야스쿠니신사는 말할 것도 없이 민간의 종교 시설이니만큼 정부의 총리대신이 공식적으로 참배하는 것 차체가 헌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A급 전쟁범죄자 14명이 야스쿠니신사에서 신으로서 받들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야스쿠니신사를 현직총리로 있을 때 가장 많이 참배한 고이즈미(小泉) 전 총리는 "전몰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참배한다"고 강변하면서 A급 전범에 대해서도 "죽으면 모두 신"이라는 말로 비켜갔습니다.

아시겠지만 야스쿠니신사의 출발은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 신정부인 메이지 정부와 구도쿠가와 막부(舊德川幕府) 세력과의 전쟁인 무진전쟁(戊辰戰爭) 이후 관군전사자의 진혼(鎭魂)을 위해서 만들어진 신사입니다. 그래서 당시 적장이었던 사이코다카모리(西鄕隆盛)는 그 곳에 신으로 받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죽더라도 죽은 사유를 따져 죽은 자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죽으면 모두 신"이라는 얘기는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당시 쇼와(昭和) 천황은 1975년부터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거나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전쟁범죄자가 합사(合祀) 되어 있기 때문이었지요. 1989년에 천황으로 즉위한 지금의 아키히도(明仁) 천황은 한번도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소는 "천황폐하 참배가 먼저"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합니다. 왜 아소를 비롯한 일본 우익들은 천황을 받드는 듯 하면서도 전쟁 이전의 천황이 되기를 강권하고 바랄까요?

정치적 술수로 야스쿠니신사 참배

아소의 부친이 바로 조선인을 징용하여 강제 노동을 시켜 많은 재산을 모았고, 아소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수상의 외손이고,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전 총리가 그의 장인임에서 알 수 있듯, 또한 바로 앞에 수상인 아베의 조부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외조부는 제56·57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 종조부는 제61·62·63대 총리를 지낸 시토 에이사쿠, 아버지는 외무대신을 지낸 아베 신따로, 아베 이전의 총리였던 고이즈미 또한 부친은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고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중의원을 역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역대 수상들의 가계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전후세력이 전쟁 이전세력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지요. 전쟁 이후 미국 정부가 일본의 민주화를 그나마 생각했던 것은 전후 1~2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소련의 남하를 막는다는 냉전을 구실로 군국주의 시대 인물을 1만 여명이나 대거 다시 일본을 이끄는 세력으로 발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스쿠니신사는 지난 세기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신사입니다. 야스쿠니신사는 국가가 전쟁에 나가라면 국민은 전쟁에 나가야 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다가 전사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가르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전쟁터에 끌려가 숨진 사람들을 일본을 지킨 신으로 떠받들고 천황과 일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려 하고 있지요.

이는 전후 일본의 우익 국가주의자들이 전쟁 이전에 만들어낸 국가주의의 상징을 계속 재활용하겠다는 정치적 술수로 계속해서 천황의 상징체를 이용하겠다는 의도 때문입니다.

아사히신문에만 난 천황 발언

2001년 12월 23일이 기억납니다. 저는 당시에 일본 오사카에서 제가 쓰고 연출한 연극 <섬.島.isle> 오사카 공연을 끝내고 도쿄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서 일본의 신문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에 먼저 손이 갔습니다. 일본 신문 중에서 아사히신문은 저에게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신문이기도 합니다.

<섬.島.isle> 오사카 공연을 준비할 때 연극의 연습실을 열 번도 더 찾아오고, 매 공연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세심하게 챙겨보았던 아사히신문의 나까가와(中川 恒) 기자,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빠짐없이 살펴보고, 철저하게 조사와 준비를 한 이후에 취재를 하고, 공연 전에 주요기사로 두 번이나 보도를 해 주었고, 공연이 끝나고 해를 넘겨 세 번째 기사인 2002년 1월 4일에는 아사히신문 문화면 전면 톱기사로 "연극의 예술적 독창성과 일본과 한국의 새로운 문화예술 교류로 성공적 작품"이란 제목으로 공연리뷰를 실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아사히신문의 저력이란 나까가와 기자 같은 끈질기게 성실한 기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갖게끔 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제가 개인적으로 신뢰를 하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때 12월 23일 자 아사히신문 1면 톱기사는 제 눈을 놀라게 했습니다. 68세 생일을 맞은 아키히도 천황이 기자 회견에서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인 다카노노 니기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 고 말해 천황가의 혈통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언급했던 것입니다. 아키히토 천황이 언급한 간무 천황은 781년부터 806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50대 천황인데, 재위 중인 현재 오늘의 천황이 일본 황실과 백제와의 혈연적 관계에 대해 직접 언급하기는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한일 과거사에 대해 언급한 것은 98년 10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일 때 "한 때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준 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한 깊은 슬픔은 항상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 적은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에 비해 이번 기자회견 발언은 훨씬 대담하며 솔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회견에서 천황은 또 "일본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한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나 초빙됐던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가지 문화나 기술이 일본에 전수돼 왔다. 궁내청 악부의 악사 중에는 당시 이주자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가 돼 지금도 아악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문화나 기술이 일본인의 열의와 한국 사람들의 우호적인 태도로 일본에 전해진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일본의 그 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과의 교류에는 이런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양국민의 교류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양 국민들이 자신들의 국가가 걸어온 길을, 각각의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도록 노력해야 하며 개개인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양국민의 사이에 이해와 신뢰감이 깊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아사히신문은 천황의 기자회견 내용을 여섯 지면에 걸쳐서 상세하게 해설 기사와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이한 침묵의 요미우리신문 등 우익신문들

그런데 조금 후에 저는 더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에서 눈을 떼고 경쟁지인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을 들춰보니까, 천황이 얘기한 '천황가의 한반도 핏줄'에 대한 기사는 단 한줄도 없었습니다. 기자회견 기사는 있었지만 천황이 가계 부문을 얘기한 부문만 쏙 빼놓고 그 부분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툭하면 천황 동정을 기사로 내보내고 천황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는 우익신문들이 천황의 역사적인 '한반도 혈연' 발언에 대해서는 언급은 물론이고 아예 입을 닫겠다는 식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텔레비전 뉴스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인 12월 24일 조간도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을 뺀 나머지 신문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습니다. 일본의 전국지 가운데 천황이 한반도와 자국 황실의 혈연을 스스로 언급한 내용을 전문과 함께 자세히 보도한 언론은 23일의 아사히신문 뿐 이었습니다.

천황 가에 백제의 피가 흐른다는 일본 국왕의 공식적 언급에 대해서는 아무리 천황이라도 철저하게 침묵했습니다. 평소에는 국왕인 천황을 신을 모시듯 떠받들어온 우익신문 요미우리는 물론이고 극우신문인 산께이신문 등, 대다수 일본 언론들은 애써 모른 척하기로 담합하고 있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아는 사실이지만 어떻게든 감추고 싶은 역사, 그래서 일제히 모른 척 하기로 작당하는 것을 저는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도쿄에서 지인들에게 천황의 모계 혈통이 백제계라는 아키히토 천황 의 어제 기자회견 내용을 아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을 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도쿄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처음 듣는 전혀 모르는 소리라 뭐라고 얘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한 신문사 기자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아니어서 기사로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자기들 역사책에 그런 기록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천황은 대대로 순수한 단일민족의 혈통을 지켜왔는데 무슨 얘기냐고 도리어 저에게 반문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천황 본인이 직접 금기시되어 온 천황가의 근본을 공개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던져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일본에 수많은 언론들은 바로 이런 파문을 의식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천황의 발언을 외면한 것으로 이해됐지만 거의 획일적인 침묵은 제 눈에 기이하게 까지 보였습니다. 더욱이 천황의 만세일계를 그렇게 강조하며 매일같이 천황을 이용하여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우익신문들의 침묵은 마치 그 신문들이 정신적인 공황(恐慌)에 빠진 것처럼 내 눈엔 비쳐졌습니다.

천황의 딸 노리노미야(紀宮) 공주를 만나다
▲ 노리노미야 공주를 만나고 있는 필자. ⓒ김상수

2003년 4월에 도쿄에서 연극 <섬.島.isle>을 공연했습니다. 공연을 보러 아키히도 천황의 딸인 노리노미야 공주가 극장으로 찾아왔습니다. 저는 작가로 연출가로 극장 입구에서 공주를 맞이하였습니다. 악수를 했습니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몇 개의 방송사에서 나온 텔레비전 카메라가 비추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KBS 밤 9시 뉴스도 동아일보도 특파원이 취재를 나왔습니다. 일본에 거의 모든 매체가 다 취재를 나온 듯했고 다음 날부터 기사로 다루었습니다.

2001년 12월에 아키히도 천황의 '한반도 혈연' 기사는 제 연극 공연 기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국제적 국가적 뉴스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만, 그리고 한국에서는 모든 신문 방송에 다 나왔는데, 일본에 미디어들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공주가 연극을 보러 온 기사는 우익신문인 요미우리도 극우신문인 산께이도 났습니다. 이처럼 천황 황실 기사는 거의 매일 일본 매체에 빠지지 않고 기사가 나옵니다. 단, 천황의 '한반도 혈연' 언급만은 일본의 수다한 미디어들이 작심한 듯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겁니다.

어쨌든 제가 만난 노리노미야 공주는 영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일본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공주는 지적인 인상을 제게 주었습니다. 공연장에는 법무대신도 왔고 일본에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왔습니다. 객석에 저와 나란히 앉아서 공연을 보면서 공주는 저와 대화를 했습니다. 문득 저는 2001년 12월의 아사히신문에 보도된 공주의 아버지인 천황이 한 얘기가 생각났고 그 얘기를 말했습니다. 공주는 차분히 제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먼 엣날부터 일본과 한국은 아주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그 얘기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공주는 진지하게 얘기를 듣고 간결한 영어로 답을 했습니다. 이후 공연이 끝나고 차를 같이 마시는 시간이 있었습니다마는 통역을 통해서 공연에 대한 얘기만 주로 하게 됐습니다.

몇 년 후, 공주는 평민출신의 도쿄도청에서 일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공주는 황실전범에 따라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의 신분이 되었고, 이름도 남편 성인 구로다에, 유아명인 사야코가 더해져 구로다 사야코(黑田淸子)로 바뀌었는데, 일반인들과 같이 주민등록에 이름을 올리고 선거권을 갖게 됐으며 결혼 직후에는 15평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국 시민 여러분, 여러분 나라에 헌법을 꼭 지켜야 합니다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제국이 패한 뒤, 일본제국 헌법인 메이지 헌법을 개정하여 1946년 11월 3일에 공포되고,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되었습니다. 시행 이후에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었으므로, 원전의 한자표기는 당시의 옛 일본식 한자체입니다. 헌법은 천황을 '국가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천황은 국사행위 등의 일부 권한만 인정되는 '상징 천황제'를 채택하였고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의 존중을 기하기 위한 국회·내각·재판소 등의 국가 조직과 기본적 질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9조에서는 "전쟁의 포기, 전력의 불보유, 교전권의 부인"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어 이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 시민 여러분들도 많은 걱정을 하고 계신 줄 압니다마는, 지금 일본에서는 새로운 의미의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이를 정당화하는데 천황이라는 존재를 필수 불가결한 명분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우익세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패전 시까지 국민을 총동원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로서 천황의 역할이 있었듯이, 오늘날까지도 우익세력들은 일본 국민의 정서 속에서 천황의 존재가 일본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존재이며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일본의 과거 회귀주의 내지는 신국가 중심주의적 정치흐름으로 몰아가려는 일본 우익의 획책들은 많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이점은 역사 왜곡문제, 히노마루나 키미가요의 강요, 천황의 신사참배 강권 등을 통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과거 동북아시아 전체를 처참한 지옥으로 몰고 간 일본제국주의에 비추어 볼 때도, 천황제가 우익정치권력에 의해 국민을 선동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크게 걱정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단지 천황제를 일본인의 정서로만 바라볼 수 없게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더하여 결정적인 문제는, 일본국 평화헌법 9조 1항과 2항의 내용을 뜯어고쳐 다시 군비를 확충하여 군사대국으로 나가겠다는 우익의 무모한 세력화가 점차 현실로 옮겨지는 위험성입니다.

1항-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귀중하게 여기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파괴,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의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

2항- 1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외의 전력(戰力)은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 역시 허용하지 않는다. (헌법 9조 1,2항)


요미우리신문과 산께이신문, 그리고 대체적으로 우경화된 텔레비전 방송 등이 공조를 취하면서 침략 역사는 반성하지 않고, 미일동맹을 기초로 한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자위대의 국제무대 행동반경을 넓히고 동아시아 역내 군사 대국화를 꾀하면서, 중국과의 패권경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 9조를 바꾸려고 하고, 현행 헌법이 일본국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패전에 따라 승전국 미국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기 때문에 주권 국가로서는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국 시민 여러분, 진실로 일본의 21세기가 평화와 안녕을 희망한다면 허망한 군사력에 의존한 안보체제 대신, '더불어 같이 사는' 아시아의 이웃 국가로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한층 강화하는 동북아시아 연대를 위한 노력을 귀국의 정치가들에게 채근하고 줄기차게 주문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낡고 완고한 패권주의적 사고로는 21세기 인류 공동체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이제 동북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즉시 절멸(絶滅)입니다. 진정으로 후대까지 이어져야 할 생(生)을 진정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존중할 것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저는 2001년에 오사카에서 연극 공연을 끝내고 아름다운 역사도시 교토(京都)의 고류우지(廣隆寺)를 방문하였습니다. 603년경 한국에서 이주해 온 도래인(渡來人) 직물기술자 하타노 가와카쓰(秦何勝)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절입니다. 절은 아름다웠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彫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국보(國寶) 제 83 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과 거의 그대로의 조각입니다. 높이만 달랐습니다. 한국에 있는 금동상이 90.9 센티미터 인데, 고류우지의 목조상은 높이 123.5 센티미터 입니다.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573-621)와 절친한 사이였던 하타노는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자신이 세운 절, 고류우지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주문했습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 하나에서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그 위에 금을 입혔다" 는 편지와 함께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신라에서 일본으로 온 도착 시기도 알 수 있습니다.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불상은 일본에는 없는 나무인 붉은 소나무(赤松)로 제작되었고 7세기 초엽인 616년에 신라 왕실에서 당시 일본 왕실로 보내주었던 것(扶桑略記 13C) 입니다. 그런데 전시된'목조미륵반가사유상'불상에는 출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이 불상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들을 초월하는 가장 뛰어난 불상이라고 찬양하면서, "이 불상만큼이나 인간 실존의 진정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시킨 예술품을 지금까지 본 일이 아직 없었다."(篠原正暎 '敗戰の彼岸にあるもの')라는 설명은 일본어 안내문에 있었지만, 그 불상이 신라로부터 온 것이라는 설명은 없었습니다. 이는 고의적으로 출처도 밝히지 않는 옹색한 처사입니다. 이는 잘못된 태도이고 아주 틀린 방식입니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이제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p.s. 일본의 언론들이 우경화로 치우치고 있음은 큰 걱정이다. 6월 29일자 아사히신문이 '촛불 집회' 관련 기사 제목에 '폭도'란 표현을 쓴 것은 문제를 정확하게 현장에서 보지 못했고 사태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사례로 보인다. 마침 지난 9월 8일 이곳 프레시안에 실린 나카노 토시오(中野敏男) 도쿄외국어대 교수의 글은 오늘 일본의 언론 문제를 시사한다. ((☞관련 기사 : 위기에 직면한 일본의 리버럴 저널리즘)

나는 아사히 신문이 2007년 5월3일, 일본정부가 요미우리 등 우파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자위대를 사실상 전쟁 수행이 가능한 정규군대로 만들기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고 하는 방침에, 헌법개정 움직임이 잘못됐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 당일에만 8개의 지면에 21개의 사설을 내보내 이런 움직임을 정면에서 비판했던 세계신문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정론지로의 아사히 신문을 기억하고 있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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