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구제금융 비용이 오히려 불안 키워
미국 정부는 시장 안정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한국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의 엄청난 구제금융 투입을 결정했다. 또 구제금융을 위한 자금 충당을 위해 국채발행 한도를 기존에 비해 6.6% 늘려 11조3150억 달러로 확대시키는 방안을 의회에 요청했다.
구제책의 규모만으로도 시장이 안정세를 보인 후 빠르게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가 한동안 이어졌지만 약발이 제대로 먹혔는지 장담하기엔 아직 이른 상황이다.
22일(현지시간) 달러화는 주요 통화 바스켓에 대해 2%가량 하락해 지난 1999년 유로화 도입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서부텍사스산 중질유(WTI)는 배럴당 16.37달러 폭등한 120.92달러를 기록해 지난 1984년 거래가 시작된 이후 사상 최대 인상폭을 기록했다.
금융시장 불안도 이어졌다. S&P500지수는 3.8% 하락하면서 지난주 금요일 상승분을 다시 토해냈다. 지난 금요일 '행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헨리 폴슨 미 재무부 장관은 국회의사당 미팅 후 구제금융 계획을 처음 발표한 바 있다. 다우존스산업지수 역시 372포인트 폭락했고 불안정한 시장을 피해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금매수에 나서 금값은 다시 급등했다.
시장이 이처럼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나친 구제금융 비용이 취약한 상황에 놓인 미국 은행 시스템과 맞물려 우려를 키우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 신문은 또 구제금융 여파로 미국의 재정적자가 1조 달러를 넘어설 가능성마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 재무부는 이미 올 회계연도 기준으로 미국 재정적자가 3894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이번 구제책이 과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투자자들이 신용위기의 턴어라운드(회생)가 과연 이뤄질 지 불안해 한다"라고 보도했다.
스코티아 캐피털의 외환전략가인 새커 티하니는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부실자산 정리 비용이 늘어나면서 정부의 재정과 납세자 부담 증가에 대한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불확실성이 달러 약세를 이끌어 미국 자산에 대한 세계적 수요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시장개입과는 상관없이 미국 기업의 파산 행진은 지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마저 나왔다. 시장이 얼마나 무너졌는가를 예측하기 어려울뿐더러 장기적 경기침체 전망마저 줄을 잇기 때문이다. <로이터>는 "소매상에서부터 주택 건설업자와 식당에서부터 금융회사와 운송업자, 에너지 회사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산업의 회사들이 고통받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런 상황은 통계로 나타난다. 기업 파산 통계업체인 뱅크럽시데이터닷컴(BankruptcyData.com)에 따르면 올해 챕터11과 챕터7을 제출한 회사의 수는 이미 지난해 전체 수준을 넘어섰다. 챕터11은 파산한 기업이 회생절차를 밟는 조치며 챕터7은 청산 절차다. 세계적 자동차 부품업체인 델파이의 경우 올 한해 대부분을 파산 보호조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금마련에 허비했다. 금융위기는 이미 실물경제로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상황인 셈이다.
특히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군림했던 월가는 이미 아시아 자본을 새주인으로 맞을 채비에 나섰다. 일본 최대 증권사 노무라증권은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 법인을 손에 넣었다. 노무라증권은 리먼브러더스의 유럽법인 역시 인수대상에 포함시켰다. 이 소식이 나온 지 한 시간 뒤 모건스탠리는 지분 최대 20%를 일본 미스비시UFJ금융그룹에 90억 달러에 매각했다.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는 결국 투자은행의 길을 포기하고 연준의 유동성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업은행으로 변신을 결정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금융기업의 지분을 고루 갖고 있는 싱가포르투자청(GIC) 역시 이번 사태를 "자산을 인수할 좋은 기회"라고 진단하며 적극 인수에 나설 의향을 보였다. GIC가 갖고 있는 시티그룹 전환사채(CB)를 전부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지분율은 약 4% 가량 된다. 중국은 직장을 잃은 월가의 인재 채용에 나섰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구체안 내용 어떻게 담길까
위기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시장의 공포도 확산되는 모양새다. 스탠다드앤푸어스(Standard & Poor's)의 다이앤 바자 국제 고정자산 헤드는 고객들에게 보내는 노트에서 "증권시장과 신용판매 시장의 기타 부문에 구멍이 계속해서 뚫리고 있고 시스템 위험에 대한 공포가 점차 커지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공포가 7000억 달러 이상의 구제 위에 나타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애널리스트들은 모건스탠리가 자본 조달을 위해 아시아를 향해 돌아섰다는 사실은 세계의 부가 얼마나 빨리 미국에서 빠져나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한다"라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의회와 적극적인 공조로 최대한 빨리 시장 지원안을 확정해 불안감을 차단하려는 심사다. 구제금융을 기업에 국한하려는 정부와 납세자의 권익 보호와 기업주의 책임까지 물으려는 민주당 사이 의견차가 얼마만큼 좁혀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장기간 회의로 정부와 의회는 몇몇 세부사안에서 의견 합일을 이뤄냈다.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위원장(민주당, 매사추세츠)은 <USA투데이>와 인터뷰에서 구제금융 방침의 하나로 의회차원의 감시기구를 만들고 구제가 필요한 주택담보대출의 담보권 상실을 막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마련키로 폴슨 장관과 합의를 이뤘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 때 납세자와 기업의 형평성 논란으로 확대됐던 납세자 보호책이 구제안에 포함될 전망이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핵심 사안에서 정부는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요구에 난색을 표하고 있어 확정안이 나오기 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문제기업 경영진에 대한 보수 제한 조치에서 일어나고 있다. 민주당은 금융구제를 받은 회사 경영진의 보수 제한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는 "기업의 협조가 어려워진다"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구제금융을 어떤 회사에 투입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정리신탁공사(RTC)의 매입자산 기준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여전하다. 이 때문에 안달이 난 부시 대통령이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며 빠른 구제 계획 통과를 바라고 있지만 협상안의 최종 도출은 24일이 지나야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심지어 공화당 일부에서는 이번 구제안 자체에 대한 회의론마저 나온다. 리처드 셸비 공화당 은행위원회 대표(앨라배마)는 "종합적이지도 않고 실행가능성도 없다"라고 평가절하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미국 특유의 로비전은 극에 다다랐다. 구제금융의 규모가 큰 만큼 혜택을 입으려는 금융회사들의 로비도 치열하다.
<뉴욕타임스>는 재무부가 부실채권 대상을 모기지에서 오토론이나 학자금 등으로 늘린 것과 외국금융기관까지 구제 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번복한 사례를 들며 "구제금융 발표 전에도 로비는 치열했다"고 전했다. 특히 구제금융안 승인일이 다가오면서 로비 활동은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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