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화부 장관이 어쩔 수없는 연극인 출신이라는 것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일곱 번은 웃고 마지막 여덟 번째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관람객이어야 한다. 이번 인사는 유인촌이라는 어느 슬픈 광대가 부르는 슬픈 노래이다. 매우 웃긴데 소름이 돋는다. 마음이 끝을 모르게 서늘하다.
유인촌, 그 슬픈 광대의 인사가 선사하는 일곱 번의 웃음
우선,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김정헌)이 없는 상태에서 위원들이 뽑혔다. 위원 임명 당시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출장 중이었다. 위원장 없는데 위원들은 뽑혔다. 앙꼬 없는데 찐빵이란다.
둘째, 너무 나이가 많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문화는 기본적으로 젊어야 한다. 생물학적 나이는 기본이요, 사회학적 나이는 획기적일 수록 좋다. 문화가 젊지 못하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늙는다. 이번 위원 10명 중에서 52세가 최연소이고 50대는 단 두 명뿐이다. 65세 이상이 5명, 70대가 2명이다. 연령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음이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너무 완전히 낡은 사람들이다. 예술위원회 경로당 됐다.
셋째, 이른바 코드 박멸 인사다. 10명 중 반 이상이 동색이다. 지난 10년간 입만 열면 '문화권력', ''코드 인사', 좌파 척출' 하더니 이런, 오른쪽으로 더 오른쪽으로, 무엇도 똑같은 젓가락 인사 했다.
넷째, 인사추천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다는데 무엇도 공개된 게 없다. 최소한 추천위원들이 누구였는지만이라도 알면 좋겠는데 자료조차 못 찾겠다. 추천위원들은 아마도 꾀꼬리였지 싶다.
다섯 번째, 문화부는 이번 인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장르 편중 해소를 꼽았다. 그런데 세보니 문학/미술이 과반 이상이다. 다원, 인디, 독립 예술은 아예 없다. 문학이 셋(김치수, 신달자, 최상윤), 미술이 둘(김정헌(위원장), 오광수)이다. 문화부는 모든 예술 장르의 원형이 문학,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입장을 냈다.
여섯 번째,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장관의 친구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신달자(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최정일(중앙대 연극학과 교수)은 문화계에 익히 알려진 명성에 비해 비교적 정치적 입장 시비에 휘말리지 않았었다. 감투와도 가깝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시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굳이 앉았다. 역시, 친구를 잘 사귀고 볼 일이다.
일곱 번째, 침묵이다. 배꼽 잡고 웃거나 자지러지게 울어야 하는 인사가 났는데 아무도 말이 없다. 작은 설화에도 유독 말이 많던 문화계였다. 문화가 어지럽히는 것을 본분으로 활기찬 것이라면 말이 많은 것은 문화계의 당연한 섭리이다. 그런데 아무도 말이 없다. 위원장도 말이 없고 덩달아 1기 위원들도 말이 없고, 문화연대와 민예총과 같은 문화단체들도 말이 없다. 현업인들 역시 말이 없다. 금융 위기로 인해 금값이 오른다던데. 아무도 모르는 사이 문화계에서조차 침묵은 금이 되었나. 아니면 문화계마저 개념을 떠나보낸 안드로메다로 집단 연수를 간 것인가?
'그럴 줄 알았으니까' 하면 될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국독립영화협회 산하 기관(충무로 영상미디어센터 활력연구소)에 2년간 있었고, 조중동이 민예총과 함께 문화계 코드 인사의 양대 산맥으로 저주했던 문화연대에서 5년간 활동했다. 공공성이 체제 친화적인 무엇이 되면 좋겠다는 고민, 혹은 반문화적인 사회가 문화사회가 되어서 나라도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설익은 방황 속에서 꼬박 20대를 보냈다. 그래서일까, 이번 인사를 보며 일곱 번 웃고 여덟 번째 비로소 슬펐다.
여전히 탄복할 만한 그림을 그리고, 존경할 만한 인격을 지닌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왜 유진룡 같은 난폭함을 보여주지 못할까? 날고 기는, 저 나이에 어떻게 저리 똑똑할까 싶은 기가 막힌 창작자들은 왜 원로들의 자리탐에 침을 뱉지 못할까?
참여정부 내내 앵무새의 아이큐로 코드인사를 떠들어대던 조중동은 정말 앵무새만도 못한 걸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던 수많은 정치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왜 민주주의를 완전히 형식으로만 박제화 한 '공공기관의운영에관한법률'에 의거한 '인사추천위원회'의 꼭두각시성을 지적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마는 것일까?
백남준의 포스트모던함, 장르의 크로스오버에, 창작의 퓨전에 그토록 열광했던 많은 이들은 왜 여전히 문학, 미술, 음악, 전통예술 그리고 그 밖의 어떤 것들로 위계화 되는 예술 행정의 관행에 침묵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핵심적 모순이 '목줄에 의한 관계', 즉 학연, 지연, 혈연의 인연 문화라고 떠들어대던 문화 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예술이 사회를 바꾼다던, 문화사회를 만들겠다던 전문가, 활동가 집단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이명박과 유인촌은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그럴 줄 알았으니까' 그러고 말면 되는 것인가. 그 당연시의 믿음은 또 얼마나 세상을 후지게 하는 것인가.
척박해지는 문화…문화계는 시대의 방관자가 될 것인가
솔직히 인정하자. 혜택 많이 받았었다. 정권의 민주적 교체, 사회의 민주화적 흐름에 문화예술이 많이 기여했고, 앞장섰고, 많이 바꾸었다. 그 대가로 정권은 문화가 사회 발전의 핵심적 원동력이라고 호명해 주었다. 한 마디로 문화예술이 '꽃 피던 좋은 시절'이었다. 물론, 명암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우리의 문화는 많이 쾌적해졌다. 또 그리고 그걸 많은 사람들은 사회는 세상은 많이 좋아졌다고 말해주었다. 그 상징적 정점은 '문화'였다.
그런데 다시 믿을 수 없도록 척박해진다. 민주주의와 맞서려는 일련의 시도들과 광폭한 시장화. 그리고 사소하게는 문화의 시대로부터 후진까지. 6개월 밖에 안 된 이명박 정권이 만개한 꽃밭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
문화계는 끝내 시대의 방관자가 될 것인가? 자기 밥상 전체가 엎어지는 꼴인데, 반찬의 가짓수나 세는 찌질이로 남을 것인가?
문화가 한국 사회 전체를 앞서가는 체 할 때, 읊었던 말 중에 '탈주가 희망의 원리'란 말이 있다. 문화는 탈주하고 있는가? 혹시,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탈주가 아니라 희망에서 탈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기 위원 명단이 우리 사회에 특히 문화예술계에 그 모두를 묻고 있다. 선택은 무엇인가? 당신들의 문화는, 우리의 문화는 쾌적한가? 문화는 협소한 무엇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 원리 그 자체임을 믿는다. 지난 주 발표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기 위원 명단이 우리에게 사회의 구성 원리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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