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파생상품이 월가를 휩쓴 사태 재현을 막기 위해서는 금융감독 당국의 역할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제2 롯데월드 건설' 등 대기업의 민원을 직접 챙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차별 대우가 심하다는 볼멘 소리가 나올만 하다.
국내 고용 책임지는 중기 피해…정부는 수수방관
환율 급등세가 이어지면서 키코 가입 기업이 입은 피해는 18일 기준으로 1조6000억 원에 달한다. 이 중 중소기업의 환차손이 1조2000억 원이다.
피해액은 환율이 상승세를 탈수록 더 커질 전망이다. 키코는 계약기간 중 시장환율이 녹인(Knock In) 설정환율보다 높게 오를 경우 옵션가입자가 계약금액의 두 배를 행사환율로 시장에 매도해야 하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계약기간이 끝난 중소기업 대부분이 녹인 상황에 걸려 계약대금의 두 배를 높은 시장환율로 사들인 다음 애초 계약한 싼 행사환율로 팔아 막심한 환차손을 입는 게 지금 상황이다. (☞ 관련 기사 : 수출기업 목 죄는 키코)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 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19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현해 "키코는 기업과 은행 간 거래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얘기할 성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키코 문제가 은행과 기업 간 거래에서 발생했다는 박 수석의 말은 맞다. 사후적으로 발생한 문제를 정부가 나서 지원보증할 경우 모럴헤저드 논란이 커질 수 있다. 박 수석의 말 대로 키코는 헤지 기능과 함께 가입자의 예측이 성공할 경우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는 파생투자상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연달아 무너진다면 국내 고용시장 안정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무관심으로만 일관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해법이 될 수 있는지에는 의문이 따른다. 더군다나 은행이 중소기업에 키코를 판매할 때 설명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항의마저 끊임없이 나오는 상황에 정부가 시장감시자로서 조사 의지마저 보이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안일한 대응이라는 지적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부가 단순히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지 말고 보다 엄격한 관점에서 은행이 설명 의무나 적합성 원칙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행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내년 2월 시행 예정된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을 적용한다면 조사결과에 따라 은행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자통법은 투자자 보호를 대폭 강화했다.
금융투자회사가 투자상품을 거래할 때 지는 의무는 상대방이 전문투자자일 때와 일반투자자일 때 확연히 다르다. 중소기업과 같이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일반투자자에게 은행이 적합한 상품을 권유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설명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은행은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은행이 성실히 책임을 다 했는데도 중소기업이 투자이익을 노려 과도한 금액을 키코에 넣었다면 책임을 져야 할 이는 바뀐다. 정부가 나서 실태조사를 해야 하는 이유다.
김 교수는 "만약 부당행위가 실제 있었는데도 정부가 방치한다면 어떻게 내년 발효될 자통법을 시장에 엄격히 적용해 '자본시장 선진화'를 이룰 수 있겠나. 정부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자통법이 담고 있는 긍정적 의미를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기업과의 차별 논란도 제기된다. 정부가 한편으로는 국방부의 반대에도 제2롯데월드 신축을 허용하고 대기업 총수의 사면을 대거 단행하는 등 대기업에는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정을 쏟는데 비해 중소기업은 찬밥 대우한다는 볼멘소리가 기업 현장에서 나온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대통령이 대기업에 관심을 쏟는 데 비해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방치하는 것 같다. 대대적인 지원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의 정도가 다르다는 데서 섭섭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키코, 은행 곳간도 태울 불씨 되나
정부가 키코 문제를 방치해서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피해가 단순히 중소기업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생상품의 특성상 중소기업이 무너진다면 키코를 거래한 국내 시중은행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키코 가입 기업은 일단 예상하는 환위험을 은행으로 분산하는 효과를 얻는다. 거래자인 은행이 이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을 리가 없다. 은행도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이를 외국계은행 등 기타 금융기관으로 이전시킨다.
규모에 따라 이를 풀로 묶어 새 상품으로 판매할 수도 있고 옵션중개자가 돼 기업이 가입한 키코를 그대로 이전할 수도 있다. 위험은 어디까지나 분산될 뿐이다. 만일 옵션 가입 기업이 무너진다면 옵션 계약 내용은 판매자인 은행이 대신 이행해야 한다. 거래가 커지면 커질수록 부담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세계 금융의 메카로 군림해 온 미국 월가가 파생금융상품의 위험분산을 이용한 잔치를 벌이다 모기지 문제로 휘청대는 상황과 같다.
당장 키코뿐 아니라 또 다른 통화옵션 피봇(PIVOT)에 가입했던 태산엘시디가 무너지자 거래은행인 하나은행이 환위험을 대신 떠안게 됐다. 계약기간인 9월 말까지 환율이 1153.30원(18일 기준)을 유지한다면 하나은행이 떠안을 피봇 관련 추정손실은 3551억 원에 달한다. 피봇은 키코와 비슷한 환위험 헤지 상품으로 환율이 1030원을 넘어서면 무조건 손실을 입게 만들어졌다.
중소기업 부실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듣는 데다 환위험을 대신 떠안을 가능성마저 제기되면서 국내 시중은행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키코 등 파생상품 담당부서는 일제히 관련 회의에 분주한 상황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키코 문제로 연일 언론에서 연락이 와 조심스럽다. 담당자와는 우리도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상황이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금융감독 당국의 대응은 느리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감독체계 마련을 위해 연구 용역을 준 상태"라며 "지금은 감독을 하지는 않고 보고만 받는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키코로 인한 손실과 피해는 중소기업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금융망을 거쳐 전파된다. 만일 태산엘시디처럼 가입 기업이 도산한다면 결국 국내은행이 옵션계약을 대지급해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며 "금융감독 당국의 역할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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