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민심과는 별 상관없이 비록 요식 행위일지라도, 명절이 지나면 각 정파들은 추석 민심을 겸허히 수렴해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나가겠다는 입장들을 발표한다. 대부분 미디어에서 설정한 의제 틀로 명절 민심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렇듯 명절 민심이란 것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정확성을 확인 할 수 없기에, 명절이 지나면 미디어의 예측은 곧장 각 정당들의 '추석민심' 수렴 대상으로 둔갑되는 현실이다. '9월 위기설'이 지나고, 난항을 겪고 있는 18대 정기국회 상황에서 정당들은 '경제', '김정일', '종교편향'을 주 전선으로 대이동을 본격화할 것이다.
집이 어디인가와 집에서도 특히 누구와 이야기를 했느냐에 따라 대화가 달라지는 것이 당연지사임을 전제로, 나름대로 올 추석 민심의 열쇠말은 탐문해 본 결과 3단어가 공통됐다. '물가'를 기본으로 하여 '주말 버라이어티'와 '안재환'이 수위를 다투는 형국 아니었나 싶다. '물가'는 '요새 애들은 싸가지가 없더라'와 함께 사랑방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전통의 강자이니 넘어가기로 하자. 안재환은 해야 할 이야기는 꽤 되지만 추석 직전에 숨 고를 틈도 없이 정보를 쏟아냈던 미디어의 '소용돌이 텍스트성(vortextuality, 모든 미디어가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는 현상)'이 만들어낸 선정적 착각에 기인한 바 조금 더 추슬러지면 성찰적으로 고민해보기로 하자. 추석 민심과 관련하여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주말 버라이어티'이다.
참고로 추석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접촉 가능했던 탐문자들은 <부동산 계급사회>를 쓴 손낙구의 분석을 빌자면,
- 부동산 2계급(집을 1채 소유하고 그 집에서 현재 살고 있는 1가구 1주택자 769만 가구),
- 부동산 3계급(집을 마련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는 사람),
- 부동산 4계급(전세나 보증금 있는 월세에 사는 가구 중에서 보증금이 5000만 원이 넘는 사람들)
- 부동산 5계급(사글세, 보증금 없는 월세, 보증금이 있더라도 5000만 원 안 되는 사람들)
중 일부였다. 집을 2채 이상 여러 채 가진 105만 가구의 부동산 1계급과 주거 극빈층의 부동산 6계급은 안타깝게도 접촉하지 못했다.
정치적 강자이지만 문화적 약자인 아버지와 문화적 강자이되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미생물 취급당하는 아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부조리한 동거, 불합리한 포지션에서 그들은 일요일 저녁에 무엇을 함께 해야 할까? 정답은, 함께 버라이어티를 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1박2일> 혹은 <패밀리가 떴다>를 보면 된다. 특히, 최근 대세는 단연 <패밀리가 떴다>이다.
아버지는 그나마 시골 어르신들을 여행 보내고 그 집을 돌보며 벌이는 좌충우돌이라는 <패밀리가 떴다>의 형식적 껍데기가 다행스럽다. 아이들은 내심 게임을 할까도 싶지만, 최소한 주말 저녁이라도 가족에 대한 예우를 해야 한다는 속 깊은 차원에서 별로 밑질 것 없는 그 시간을 받아들인다.
물고기 한 마리 잡는 것으로 호들갑을 떨고, 채소 따는 일에도 퍼포먼스를 필요로 하는 <패밀리가 떴다>의 상황이 마냥 작위적이기만 했던 아버지였지만 그것도 자꾸 보니 적응이 되고 얼핏 웃음이 난다. 내심 <무한도전>까지 도전해 볼까 싶지만, 현란한 구성과 혁신적인 자막, 한 마디로 뭐가 뭔지 모르게 산만하기만 한 <무한도전>은 여전히 납득이 어렵다.
최근 기억으로 유원지화 된 여행지 밖에 가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체험과 교훈이 있는 오붓한 가족 여행을 상상하지만, 모든 것은 돈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우는 얄팍한 주머니 사정과 그나마 도저히 조정되지 않는 남편과 아이들의 이기심 앞에 무기력하다. 그 공허함을 <1박2일>을 파고든다. 아이들은 소비 사회의 정석적 문법을 가르쳐주는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며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함과 재수 없음에 대해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싶지만, 교실의 패권적 질서를 닮아있는 <1박2일>의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보기'와 '케이블'이 있기에 별 불만 없이 주말 저녁의 타협을 선택한다.
추석은 주말 버라이어티의 최고봉은 무엇이냐는 격론의 경연장이었다. 처음에는 신기하더니 곧 우리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싶었다. 이명박을 뽑으면 경제가 나아질 거라는 소박한 믿음을 가졌던 아버지와 정치·경제·사회·문화보다 우리 집이 중요한 어머니와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2MB는 쥐박이'이라고 낄낄대는 아이들의 천연덕스러운 공존은 그나마 주말 버라이어티가 있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강호동과 유재석 중 누가 진정한 국민MC인지, 박명수와 이수근 중에서 누가 더 웃긴지를 가리는 각각의 그럴싸한 입장들이 첨예하게 맞섰다. 그것은 <무한도전>, <1박2일>, <패밀리가 떴다>로 이어지는 복제성이 결국, 타락한 반영이어서 원래의 것보다 열등해져 간다는 플라톤 철학의 입장(simulacrum)과, 모든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일 뿐 재밌으면 됐지 '깊이', '일관성', '독창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충돌 이었다. 또한 그것은 부모가 제공하는 경제적 안락함을 끝까지 누리려는 나약한 아이들과 그 경제를 수성하기 위해 남의 집 자식을 착취하는 부모의 이율배반이 사회적 악순환의 고통으로 각인되지 않고 오락적 수단에 의해 평화적으로 봉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주말 버라이어티 재방으로 추석 편성표는 도배되었다. 이번 추석, 무엇을 고민하고 또 말해야 했던 것일까? <무한도전>, <패밀리가 떴다>, <1박2일>이 벌이고 있는 주말 버라이어티 삼국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대중문화 전반은 물론 일상의 상당 부분을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TV는 조건 반사적으로 사람을 웃게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가 지배하는 시대. 예능이 다른 모든 장르를 압도하는 이 기이한 시대를 어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비로소 리얼리즘(realism)마저 약속된 '리얼', 매뉴얼화 된 '리얼', 게임화 된 '리얼'이어야 소비되는 이 상황을 또 어찌 헤쳐가야 하는 것일까?
각 정파, 정당 그리고 모든 정치적 입장들이여, 내년 설이 오기 전에 이것에 대한 답을 달라.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와 종교 편향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고민해보겠다. 대통령의 말마따나 어려운 경제는 각자 좀 더 분발해 보겠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닌 듯싶다. 주말 저녁 버라이어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전망을 세울 수 없는 천심(天心)을 직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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