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 여건을 떠나 마치 외평채의 성공적 발행이 곧 '위기의 끝'인 양 지나친 정치적 해석으로 일관한 정부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를 키웠다. 또 정부의 이런 태도는 '외평채 발행 실패가 곧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과도한 해석을 하는 정부 반대론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정부의 욕심은 당초 기대와는 달리 금융시장의 혼란을 더 부채질한 결과만 낳게 됐다.
외평채 발행 5년 만에 실패
12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10억 달러의 외평채 발행을 위해 미국 뉴욕에서 투자자들과 막판까지 협상 줄다리기를 벌였으나 기준금리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해 채권 발행 연기를 결정했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해외 투자자 중 일부는 미국 국채에 붙이는 가산금리로 230베이시스포인트(bp, 2.3%포인트) 이상까지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자들이 이처럼 자금대여 비용으로 높은 수수료를 요구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국제 자금 시장 경색이 완연한 까닭이다. 국제자금시장 경색 정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인 채권발행량은 금융채·회사채를 중심으로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한국금융연구원이 발표한 '최근 우리나라의 외화유동성 현황과 정책적 고려사항'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4분기 중 주요 선진국의 금융채·회사채 순발행규모는 2390억 달러에 그쳐 지난해 같은 기간(3460억 달러)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부족한 외화유동성은 공공부문을 통해 메워졌다. 사채 발행량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국제 자금시장이 경색됐음을 의미한다.
정부 역시 국제자금 조달이 어려워져 외평채 발행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번 협상을 이끈 신제윤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이 "미국 금융시장 신용경색이 한 마디로 말해 '돈줄이 말랐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여기에 갑작스럽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번져 지정학적 위험이 커진 데다 최근 요동친 한국 금융시장 지표 자체도 해외 투자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김상훈 현대증권 수석연구원은 "비교적 제한된 데이터를 가지고 투자의사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외국인 투자자가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마침 리먼브러더스의 유동성 문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병세 등 돌발변수마저 터져 저쪽(투자자)에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 것"으로 평가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나
하지만 이번 발행 연기를 단순히 외부 요인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말해 돈을 쥔 투자자가 빌려주기를 꺼렸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가 과거만큼 탄탄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는 추측도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장 외화 조달여건을 나타내는 가산금리 추이가 시간이 갈수록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8월만 해도 85bp(0.85%포인트) 가량이었던 외평채 가산금리(5년 만기 기준)가 최근에는 160~180bp 수준까지 올랐다. 프리미엄이 이만큼 늘어났음은 한국의 외화조달 여건이 어떤 이유로든 과거보다 나빠졌음을 뜻한다.
국가신용도의 주요 평가잣대로 여겨지는 신용부도스와프(CDS)프리미엄 역시 1년 만에 70bp 가량 올라 최근에는 100bp를 넘어서고 있다. 그만큼 과거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외화를 끌어다 쓸 수 있게 된 셈이다. CDS프리미엄은 채권 발행주체의 부도(디폴트) 가능성에 대비해주는 신용보험의 보험료 성격을 가진다.
이처럼 국제 자금조달 여건이 어려워졌음이 대·내외적으로 명백해 정부가 당초 기대한 낮은 비용 수준의 외평채 조달 시도는 무리였다는 게 중론이다. 당초 정부 협상단은 외평채 가산금리 수준을 놓고 "미국 국고채+200bp로 결정될 것"이라고 못 박는 대담함을 보일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외평채 가산금리는 사실상 국제시장에서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의 기준금리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협상 당사자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게 상식적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정작 자기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오만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외평채 가산금리 자체가 시장 상황에 따라 어떻게 결정될 지 알 수 없는데 정부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을 갖고 나갔다"며 "'나와 보니 심각하더라'는 말은 금융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관계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런 해명을 하는 것을 보며 답답함마저 느꼈다"라고 비판했다.
정부, 과도한 정치적 해석 배제해야
정부의 태도에서 이번 외평채 발행을 최근 들어 터져 나오는 '위기설' 진화의 계기로 삼으려는 모습마저 보였다는 점도 문제다. 당장 정부는 "외평채 발행에만 성공하면 위기설이 거짓이었음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는 태도를 언론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 왔다. 마치 만병통치약인 듯 인식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당초 정치적 목적 달성에 실패해 사상 초유의 발행 연기 결정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정치적 실패에 처했음은 물론 외평채의 정기적인 발행이 갖는 의미도 잃어버렸다.
신환종 연구위원은 "외평채 발행은 정기적 평가의 성격을 가진다. 꾸준히 외국투자자들에게 한국 경제 상황을 설명하는 벤치마크이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금리 수준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외평채 발행이 갖는 역할을 포기해버려 오히려 국내 금융시장에 혼란을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환시장은 하루 19원의 변동폭을 보일 정도로 크게 출렁였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이번 발행 연기가 앞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을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한 외환시장 딜러는 "외평채 금리가 높다고 해도 결국 국제금융시장 상황에 맞춰 조정되기 마련"이라며 "외평채 발행 실패로 기준금리 설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자금 조달이 급한 기업의 경우 오히려 단기로 외채를 끌어다 쓸 가능성이 있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시장 전문가들은 정부가 금융시장 접근에 정치적 목적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단기적인 시각을 갖고 정치적 성과 과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김상훈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국내·외적으로 뭔가 보여주려는 의도가 짙은 듯하다. 그런데 미묘한 시기에 걸려 오히려 어려운 상황을 더 크게 알려버린 꼴"이라고 언급했다.
신환종 연구위원은 "정부가 외평채 발행 '한 방'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다"라며 "그 와중에도 정작 대외경제 여건이 얼마나 나빠지고 있었는지는 신경쓰지 않은 듯 하다. 이미 지난 5월 베트남에 외환위기설이 돌면서부터 한국의 신인도도 나빠지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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