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고민은 당장 이성태 한은 총재가 이날 직접 "물가상승 압력이 줄어드는 부분이 있지만 반대로 커지는 부분도 있다. 여기에 최근 2년 가까이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국제금융상황을 봐가면서 운용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한 데서도 묻어난다.
성장 전망 바뀌지 않아
당장 실물경제 부문에서 보이는 경기 둔화 요인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 총재는 "수출이 꾸준히 늘고 있지만 소비라든가 투자가 좋지 않아 경기 둔화 움직임이 지속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용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금융시장 가격변수도 불안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물가관리가 한은의 주된 임무지만 부진한 국내외 경기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해명이다.
여기에 대외 경제 여건도 좋지 않아 수출 전선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한은의 금리동결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경제는 7월 중 소매판매가 4개월 만에 감소로 전환하는 등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EU와 일본의 경우 2/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전기대비 마이너스로 돌아서는 등 최악의 경기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EU의 GDP성장률은 -0.8%로 유로화 출범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일본 또한 -2.4%를 기록해 경기 둔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달 금리 인상은 시장에 예고된 상태라 후폭풍이 적었지만 만일 이번 달에도 연이어 금리를 추가 인상했다면 시장에 미치는 충격파가 커 자칫 경기 둔화 책임을 한은이 뒤집어쓸 수 도 있는 판국이었다.
결국 이번 동결 조치로 기존 성장 전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소비투자가 부진하지만 수출은 그런대로 꾸준함을 보일 것"이라며 "지난 7월에 전망한 하반기 성장률과 실제 성장률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물가 오름세 높지만…"성장률에도 관심"
하지만 물가 오름세는 여전히 높다. 8월 중 소비자물가와 근원인플레이션은 각각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6%, 4.7% 상승했다. 한은도 "국제유가 하락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소폭 낮아졌지만 앞으로 상당기간 높은 오름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밝혔다.
이 총재 역시 "5.6%라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한은이 목표로 삼고 있는 3.5%를 감안하면 2%포인트 이상 높은 수준이다. 채소, 유류제품 등을 제외한 핵심물가는 8월에도 4.7%로 전달 4.6%에 비해 오히려 높아졌다"라며 "간단히 말해 물가사정은 별로 좋아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최소한 몇 달 동안 물가상승률이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금방 내려올 것 같지는 않다"고 밝혔다.
특히 근원 인플레이션이 꾸준히 오르는데 대해 이 총재는 "원유 공급 충격이 원인이다. 지금 원유 가격이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지만 원유를 직접 사용하는 제품은 물론 2차, 3차로 해서 간접적으로 원유를 소비하는 제품 값도 꾸준히 오르는 것 같다"며 "앞으로 근원 인플레이션이 어디까지 갈 것이냐 하는 수치를 직접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라고 밝혔다.
여기에 주택시장이 다시 꿈틀댈 기미마저 보여 물가 추가 상승 압력이 커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8월 아파트 매매가격이 전달에 비해 0.1% 늘어나는 데 그치는 등 부동산가격 상승세는 다소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정부의 건설경기 부양책으로 주택 매매가격이 언제든 앙등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지난 9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도심 재건축과 재개발 활성화를 강조한 데다 청와대도 "당장은 아니라도 소형·임대주택 건립 의무 비율과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를 한데 묶어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강남 대치동 등 아파트 거래가 집중되는 지역에서 매물은 추가 가격 상승 기대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상태다.
주택시장이 다시 오름세로 전환할 경우 정부로서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직접 물가관리에 나설 가능성이 생긴다. 감세정책으로 안 그래도 폭 넓은 재정운용 주도권을 잃은 정부가 경기부양에 따른 물가상승 추가 압력에 직면할 경우 환시장 개입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지속적으로 원화를 매입해 시중 유동성을 줄이려는 유혹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금리인하 유혹으로 이어져 한은에 추가적 압박이 가해질 수 있다. 한은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앞으로 전망에 대해서 이 총재는 "국제 원유가격이 상당히 내렸지만 원화 가치가 그 동안 국제금융시장 불안으로 인해 많이 떨어졌다"며 "여기에 공공요금 인상 단행까지 감안한다면 전체적으로 물가는 상당기간 쉽게 내려가지 않을 것 같다"라고 언급했다. 특히 금융시장에 대해서는 "가격 변동이 너무 커서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총재 본인이 밝혔듯 한은이 앞으로 물가 상황이 좋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음에도 금리 추가 인상 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한은도 국가 경제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본연의 임무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질의응답 시간에 "꼭 한국은행 입장만 강조하기 보다는 국가 전체 입장에서 성장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나섰다. 기준 금리를 올릴 수도,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어 부담을 느끼는 한은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물가상승 압력이 여전하고 서민들이 이로 인해 큰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은이 금리 동결 결정을 내린 것은 한은 금통위 결정에 재경부나 청와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한은의 금리정책이 정부의 정책 의도에 따라 종속 변수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 준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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